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 엘리 Jul 08. 2019

80년 만의 폭염에 대처하는 자세

물놀이장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 9시가 채  되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태양은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혈기왕성한 30개월 아이와 집에만 있을 순 없었다. 아침부터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채유야, 오늘 물놀이장 갈래?
우와아~ 신난다!! 지금! 지금!



아이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환호성을 질렀다. 지금 바로 가자며 잠옷 차림 그대로 (한쪽 팔로 오리 인형을 끌어안은 채) 현관문으로 돌진한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아이의 오른쪽 눈을 모두 가려버렸다.


"잠깐, 잠깐. 엄마, 아빠도 세수하고, 채유도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나서 가야지."


벌써 신발을 손에 든 아이를 가까스로 거실로 들여와 앉혔다. 분주한 건 아이만이 아니었다. 남편도 베란다에서 그늘막 텐트와 캠핑의자를 꺼내왔다. 물놀이장 개장 전에 일찍 가서 그늘 자리를 맡아 텐트를 치자고 했다. 남편의 목소리가 어쩐지 들떠있었다. 지난주에 새로 산 텐트를 개시할 생각에 신이 난 듯했다.


나도 아이스박스를 열어 방울토마토며 블루베리며 자두며 옥수수며 먹을거리를 한아름 챙겼다. 비치 타월도 여러 개 챙기고 여벌 옷도 챙기고 텐트에서 읽을 책과 토요일자 신문도 챙겼다. (펴보지도 못할걸 알면서도 왜 늘 책을 챙기는가, 여전히 의문이다.)



오전 10시 땡하고 들어간 토평 물놀이장. 좋은 자리는 벌써 마감되었다.



집 근처 10분 거리의 물놀이장에 도착했다. 오전 10시 8분. 물놀이장은 10시에 오픈하니 딱 맞춰 도착한 셈이었다. 하지만 텐트칠만 한 나무 그늘 자리는 이미 만원이었다.


"엄마가 아침 8시 반부터 와서 미리 텐트 쳐놨지!"


한 아이 엄마의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초등생 자녀를 둔 엄마가 개장시간에 맞춰 온 아이들에게 기분 좋게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아, 미리 텐트를 쳐야 되는구나. 다음에는 좀 더 서둘러야겠구나' 생각했지만 아마도 우리는 다음에도 일찍 오지 못할 것이다.


차선책으로 수영장 들어가는 입구와 가까운 곳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오전 10시에는 분명 그늘이었지만 12시에는 땡볕이 되고 오후 2시에는 반쯤 그늘이 드는, 해에 이동에 따라 흥망성쇠가 있는 자리에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그늘막이 커서 억지로라도 그늘을 만들어주었는데 아이는 텐트에서 잠깐잠깐 먹기만 할 뿐 엉덩이 붙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수영장으로 쪼르르 달려가 물놀이하기에 바빴다. 덕분에 남편도 나도 아이와 함께 노느라 텐트에서 쉬지는 못했다. 텐트보다 물을 맞으며 노는 편이 더 시원하기도 했고.




30개월 아이는 물놀이장에서 7시간을 내리 놀았다



햇빛은 뜨겁다 못해 따가울 지경이었는데 물은 이보다 시원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작년 이맘때 왔을 땐 아이가 18개월 때라 2시간 놀고 낮잠 자고 그랬는데, 30개월이 되니 아이는 쉼 없이 미끄럼틀과 분수대와 수영장을 종횡무진하며 물놀이를 만끽했다.


짜장면을 먹자고 해도 "싫어", 음료수를 먹자고 해도 "싫어",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해도 "이따가"를 외칠 뿐 물놀이장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낮잠? 당연히 한숨도 자지 않았다.


작년엔 물이 차가워서 입술도 금방 파래지고 그랬던 것 같은데, 7시간을 놀아도 끄떡없었다. 아이는 놀라울 만큼 체력도, 정신력도 강해져 있었다.  




물이 깨끗했던 오전의 수영장, 주말엔 아빠만 찾는 아빠 바보인 딸은 수영도 아빠랑만 하려고 했다



우리가 이용한 곳은 토평 물놀이장인데, 이 곳은 유아가 놀기에 딱 좋게 설계되어있다. 20~30cm 남짓의 얕은 수영장, 2~3개의 분수대, 낮은 미끄럼틀이 있는 놀이 시설이 전부인 아담한 곳. 하지만 30개월 아이에게는 그 어떤 휘황찬란한 워터파크보다 신나고 재미있는 곳.


게다가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고 모든 이용 시설은 무료다. 자릿세도 안 받고 시간제한도 없다. (샤워장도, 카페도, 식당도 없다. 오후가 되면 수질이 급격히 나빠진다는 건 단점.)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매주 여기를 온다고 봐야지




배달시킨 짜장면을 먹으며 남편은 말했다. 아이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예상치 못한 아이의 '격공'에 나와 남편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린다.


그날 저녁, 뉴스에서 '오늘 낮 기온이 80년 만의 최고기온'이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뜨거워도 너무 뜨겁더라니.


80년 만에 온 폭염에도 우리 30개월 꼬맹이는 참 맹렬히도 놀았다. 그리고 밤 9시도 되지 않아서 기절하다시피 잠들었다. 여러모로 맹렬한 하루였다.


'80년 만의 폭염'에 물놀이장이라니..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네,라고 생각하며 냉장고에서 얼음장같이 차가운 맥주를 꺼내 한 모금 들이킨다. 이보다 완벽할 수 있을까. 너무도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 언어의 여자, 유튜브 언어의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