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니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2017년 1월 10일 오후 3시 18분. 000 산모 여아 2.91kg로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그 시각 난 하반신 마취를 한 채 산부인과 수술대에 누워있었다. 응애응애, 아이 울음소리가 함께 들렸고 내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아,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났구나. 안도와 기쁨이 섞인 뜨거운 눈물이었다.
수술 들어가기 직전에 난, 간호사를 붙잡고 전신마취를 해달라고 애원했다. 간호사는 수술대에 누운 나를 내려보며 한쪽 귀에서 마스크 고리를 뺐다. "산모님, 아이 안 보실 거예요?" 내가 잠시 망설이자 나를 안심시키듯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금방 끝나요. 뱃속의 아이 만나봐야죠. 괜찮아요." 그리고 그녀는 나를 모로 눕혔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무서웠다. 수술대에 누운 것도 처음이고 몸에 마취를 하고 하는 수술도 처음이었다. (쌍꺼풀 수술은 제외하겠다.) 아이는 역아인 채로 38주를 맞았고 수술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전신마취를 하면 아이를 낳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어느 쪽이 더 무서울까, 그 찰나에도 저울질을 했던 것 같다. 결국, 난 아이를 낳는 순간을 선택했다.
부드러운 바이올린 선율이 울려 퍼지는 병실, 조금 더, 조금 더 힘내자, 며 아이에게 말을 걸던 나긋나긋한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 아이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 1,2초간 진공상태처럼 고요했던 수술실, 아이를 당길 때마다 움직였던 아랫배의 진동, 세상에 나온 직후 응애, 응애 하고 힘차게 울던 아이의 첫 울음소리, 000 산모 여아 2.91kg로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하고 호명하던 간호사의 차분한 목소리.
나는 이 모두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순간이, 내 안에 선명하고 또렷하게 담겨있다.
무릇 신생아란, 밤낮이 바뀌어 빽빽 울고, 안겨서 곤히 자다가도 눕히면 어김없이 울고, 배고파도 울고, 배 아파도 울고, 응가해도 울고, 심심해도 우는, 하루 종일 울기만 하는 생명체라고 들었다. 그 시절 엄마는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가고 머리도 감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산다고들 했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산후조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날, 낯선 곳일 텐데도 아이는 한 번을 울지 않았다. 2시간씩 규칙적으로 침대에 누워 잠을 잤고 일어나면 모유를 먹었다. 그 후에는 모빌을 보거나 엄마랑 눈 맞춤을 하며 놀다가 또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밤잠도 잘 잤고 깨서도 우는 법은 없었다.
아이가 워낙 잘 자는 통에 나는 혼자 육아를 하면서도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샤워도 하고 누워서 쉴 수도 있었다. 그 시절 우리 부부는 우리 아이가 '울음이 없는 아이'인 줄 알았다. (34개월인 지금은 집안이 떠나가라 잘만 울고 있다.) 내게는 아이가 누워서 생활했던 신생아 시기가 아이 키우기 가장 수월했던 기간으로 기억한다.
왜, 나는 신생아 키우기가 어렵지 않았던 걸까?
시간이 흐르면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다들 신생아 때가 제일 힘든 시기라고 입을 모으는데 왜 나는 공감을 하지 못할까? 왜 나는 남들과 다른 경험을 갖고 있을까? 이것에 대해 골돌히 생각해봤다.
아이가 순해서?
우리 아이는 순한 편이었다. 인정한다. 그렇지만 순하건 순하지 않건 모든 신생아는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써야 한다. 한마디로 손이 많이 간다. 순한 애도 새벽에 2시간마다 깬다. 순한 애도 배앓이를 하고 열이 난다. 순한 애도 매일 목욕을 하고 대여섯 번 기저귀를 갈아줘야 한다. 순한 애에게도 아무런 이유 없이 1시간 이상을 우는 마녀 시간이 찾아온다. 몸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신생아를 돌보는 것은 분명 녹록지 않은 일이다. 아이가 순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다.
남편이 많이 도와줘서?
모유수유를 하는 나를 위해 남편은 격일로 미역국을 끓여줬다. 퇴근 후 저녁도 차려줬다. 그 시절 나는 요리를 하지 않았다. (그때 이후 남편의 요리 실력은 급격히 늘었고 나는 지금도 요리를 즐겨하지 않게 되었다.) 남편의 직업 특성상 일찍 퇴근해서 집안일과 아이 목욕시키기 등을 함께 했다. 남편은 아이를 보는데 점점 능숙해져 갔다.
남편이 적극적으로 육아에 임한 덕분에 신상아 케어가 수월했다고 생각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은 힘이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몇 주간 산후 도우미와 함께 살기도 하고 친정에 몇 달 들어가서 살기도 하지 않은가. 나는 단 하루도 산후 도우미의 도움이나 친정엄마,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옆에 붙어서 생활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남편이 오기 전까지는 아이와 나 단 둘이 생활했다. 흔히들 말하는 독박 육아인 상황이었는데 나는 그게 괴롭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와 나 오롯이 있을 수 있는 상황에 만족감을 느꼈고 감사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문에 대한 자답을 해보자면, 내가 납득한 결론은 이거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라고.
가령, 나는 아이가 우는 것을 그저 운다, 고 받아들였다.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울어? 하지 않고 엄마 찾았어? 하며 안아줬다. 고막이 찢어질 듯 시끄럽게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거슬리고, 이에 신경이 예민해질 때면 왜 계속 우냐고 짜증 내거나 당황하는 대신 생각했다. 아이는 할 줄 아는 의사소통이 울음밖에 없다는 것을. 신생아가 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아이들은 자기 의사나 요구를 표현하는 데 울음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중략) 아기는 독자생존능력이 없다. 울음은 그러한 불안감의 표현이다.
- 전 대한 소아과학회 회장 이근, 내 아이 캥거루처럼 키워라 중에서
아이가 어릴 땐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다. 1월에 출산한 나는 날씨때문에 더더욱 외출이 힘들었다. 낮에 누군가 있어주면 잠깐 카페도 갔다 오고 병원 가서 도수치료도 받고 오고 할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랑 집에 있는 것은 갑갑했지만 이렇게 단 둘이 생활하는 시기가 또 언제 오겠냐며 지금의 현실을 껴안았다.
왜 나는 예전처럼 자유롭지 않은 거야? 모유 수유하는 통에 매운 것도 못 먹고 술도 못 먹잖아, 하고 불만을 터뜨리거나, 어느 세월에 젖먹이 아이를 다 키우고 난 언제 일할 수 있지? 하고 오지도 않을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 아예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을 깊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이를 낳은 이 상황에 충실하고자 마음을 고쳐먹으니 신생아와 단 둘이 엉켜있는 그 시간들의 소중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아이가 34개월인 지금도 난 여전히 마음편히 잠을 잘 수가 없다. 아이는 종종 새벽에 깨서 우유를 찾기도 하고 무서운 꿈을 꾸었다며 울기도 한다. 신기한 것은 강제로 잠을 빼앗겼으면서도 난 한걸음에 아이에게 가닿아 아이를 안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반쯤 찡그린 눈에 희미하게 웃음이 번진 채로. 지금 내 품에 쏙 안긴 이 아이가 언제까지 새벽에 날 찾을까 싶어서. 그런 생각이 미칠 때면 아이를 한번 더 꽉 껴안는다. 내겐 아이와 살갗을 비비댈 수 있는 이 새벽녘이, 온 얼굴을 찡그리며 떼를 쓰는 아이의 구겨진 얼굴이, 너무나 소중하고 아깝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