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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Nov 18. 2019

우리 집엔 꼬마 장 미셸 바스키아가 산다

너의 뇌에 수십만 개의 불꽃이 튀었다면야 벽지가 뭔 대수겠니

 그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평일 저녁. 목욕을 하고 나온 딸아이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자신의 침대 위에서 콩콩 뛰기 시작했고 나는 젖은 머리를 말리러 거실로 향했다. 남편은 샤워하고 있는 중이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후에 벌어진, 아니, 이미 과거가 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된 그 광경을 뒤늦게 목격한 그 찰나뿐이니까.


허헉...흡..


우리 집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안방 벽면에 꽉 채워진 아이의 작품 © 엄마 엘리



 어쩌면 지나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면이 아니라 옆면에 위치한 그 벽면을.

 

 내가 처음 그 굉장한 것을 목도했을 때 내 눈은 수평으로 가늘어졌다가 휘둥그레 해졌는데,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생각이란 것이 필요해서였다. 허헉, 흡. 상황판단이 끝난 동시에 난 나도 모르게 벌어진 내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의 조인성처럼 주먹을 집어넣었던가. 주먹이 들어갈 만큼 입이 크게 벌어져있긴 했다. 내가 그렇게 얼빠 져있을 때 사건의 당사자인 딸은 진즉에 이 곳을 벗어난 뒤였다.  


 이사온지는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벽지는 새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 밤 사이 쌓인 함박눈처럼 세상을 하얗게 덮은 벽면에 아이는 자신만의 발자국을 새기고 싶었던 걸까? 여태 낙서라곤 하지 않다가 느닷없이 오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오른 걸까? 이렇게 순식간에 한 벽면을 다 채울 만큼? 우리 아이가 이렇게 과감하고 저돌적이었던가?



네임팬으로 거실 소파에 창작을 해놓았던 딸 © 엄마 엘리



 생각해보니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여름, 아이는 네임펜으로 거실 소파에 자신의 창작욕구를 쏟아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참 어이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었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필, 지워지지도 않는 네임펜으로 그린 걸까. 그 펜을 왜 난 아이 손에 닿는 곳에 두었던 걸까. 아이보다 나를 원망했다. 지워지지도 않을 걸 알면서도 아쉬운 마음에 나는 수건에 치약을 묻혀 지워보았고 티끌도 지워지지 않는 것을 본 아이는 해맑은 미소로 나를 쳐다봤다. 딱히 용서를 구하는 웃음은 아니었지만, 그 천진난만한 얼굴에 난 피식, 하고 웃음이 나고 말았다.


 딱히 혼을 내지는 않았다. 혼을 내야 하는 일인지 헷갈렸다. 그렇게 화가 나지도 않았다. 이미 엎어진 물이었고, 그때 읽은 육아서 덕분이기도 했다. 여름이면 매미가 울 듯, 아이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책의 내용이 나의 입을 막아줬다. 아이를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가 딱히 잘 못을 저지른 것 같지는 않았다. 소파가 내게 큰 위안을 주는 물건도 아니었고. 소파 쿠션이야 양면으로 쓸 수 있어서 뒤집어 놓으면 멀쩡하기도 했고.



집안 곳곳에 아이의 작품들 © 엄마 엘리


 그런데, 벽면은, 벽지는 좀.. 뭐랄까, 다른 성질의 것이라고 해야 할까?

 덧붙일 수도, 뒤집을 수도 없는 데다 지우려고 하면 할수록 흉한 자국만 선명해지는 기분이라 어떻게 없앨 엄두도 나지 않으니까.


 돌이켜보니, 사건의 징후가 있긴 했다. 아이는 보드판 옆에 얇은 벽면에 마카로 그림을 그리고, 거실 티브이 옆 공간에도 뭔가 낙서인지 창작행위인지 비슷한 행위를 하긴 했었다. 바닥에도 색칠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바닥은 잘 지워졌다.) 그럴 때마다, 아, 여기다 뭘 그리고 싶었던 거구나. 그렇지만 여긴 도화지가 아니니 보드에 그리거나 스케치북에 그리렴. 하고 타이른 것이 전부였다. 그 사이 아이는 조금씩 대범해지고 있었나 보다. 아이 안에 과감한 창작 에너지가 커지고 있었나 보다.



 뒤늦게 안방에 모습을 드러낸 남편에게 먼저 그 굉장한 것을 향해 눈짓을 했다. 순간 남편의 작은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도 별 말을 찾을 수 없는 눈치였다. 우리 딸, 꼭 장 미셸 바스키아 같지 않아? 하고 내가 말하니, 그는 그게 누군데? 하고 되물었다. 나는 설명하는 대신, 딸아이를 불렀다. 


 채유야 이거 네가 그린 거야?
꼭 장  미셸  바스키아 작품 같네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미국의 낙서화가. 낙서, 인종주의, 해부학, 흑인 영웅, 만화, 자전적 이야기, 죽음 등의 주제를 다루어 충격적인 작품을 남겼다. 팝아트 계열의 천재적인 자유구상화가로서 지하철 등의 지저분한 낙서를 예술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출처 : 네이버 두산백과]


 아이 역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 채유가 한 거야? 왜 그런 거야? 하고 묻는 아빠의 얼굴을 쳐다보며 자랑스럽고 뿌듯한 얼굴을 하며 아이는 말했다. 이거, 다~~~~ 채유가 그린 거야. 

 

 그런 아이를 향해 난, 그래, 그럼 이제부터 여기다가 마음대로 그려.라고 시원하게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진 않았다. 그 벽 옆에 새하얀 붙박이 장이 병풍처럼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뇌에 수십만 개의 불꽃이 튀었다면야 이깟 벽지가 대수겠는가, 싶으면서도 아직 붙박이장만은 온전하게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가로막았다. 결국 난 그 말을 아이에게 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꾸준히 그 벽면에 무언가를 덧 그리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선이 몇 개 더 그어져 있다. 마음을 비운 데다 3세 아이의 상상과 창의의 산물이라 생각하니 한낱 낙서로만 보이지 않는다. 정말 예술작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독특하고 특별한 예술품이 우리 집 가장 큰 벽면에 걸려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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