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즐거움
우연의 일치였을 테지만, 찬바람이 부니 시가 읽고 싶어 졌다.
평소에, 아니 살면서 한 번도 시에 빠진 적도 없던 나였는데. 시라고는 윤동주나 안도현, 김춘수처럼 교과서에 실린 시인들의 대표작 정도 읽어봤을까. 수능에 나오지 않는 시는 보지도 않았지만. 딱 그 정도지만. 그냥 문득, 시, 가 읽고 싶어 졌다. 요즘 갑자기 클래식이 듣고 싶어 진 것처럼. 갑자기.
그런데 뭘 읽지? 싶은 거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더 잘 먹는다고, 시도 평소에 읽어본 사람이 더 잘 알 텐데. 주변에 딱히 시를 즐기는 이도 없는 거 같고 해서 나도 그냥 '시가 읽고 싶다'는 마음만 간직한 채 다른 책들을 읽는 중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어느 브런치 작가의 글을 보았다. 그는 말했다. 바라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시를 읽는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을 땐 해독 불가한 텍스트가 어울린다고.
그 글을 읽는 순간, 어쩐지 내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쉬우면 쉬운대로 일단 시부터 대면해야겠구나 싶었다. 그 글에 댓글을 달았다. 시를 읽고 싶은데 몇 개 추천해달라고. 그녀가 추천해준 시집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아. 정말 난해했다. 하루 종일 시 한 개를 소리 내서 읽고 속으로도 읽고 필사도 해봤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산문시를 난생처음 접했다. 평온한 내 인생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다 읽지 못한 채 반납했지만 어쩐지 나는 시가 더 읽고 싶어 졌다. 시, 별거 아니구먼. 만만해졌다. 그 뒤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시집들을 몇 권 더 빌려왔다.
3살 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키즈 카페다.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출근도장을 찍는다. 그럴 때면 난 아이 간식과 함께 책 한 권을 꼭 챙긴다. 책은 가방 안에서 잠자고 있다가 키즈카페 구경 한번 하지 못하고 그대로 집에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난 그렇게 읽지도 못할 책을 챙기곤 했다.
이제는 두꺼운 책 대신 얇은 시집 한 권을 챙긴다. 아이가 놀이에 열중할 때면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과 함께 시를 읽는다.(그거 아는가? 왠만한 키즈카페 커피가 여느 카페 부럽지 않게 맛있다는 것을.) 키즈카페에서 시집은 아주 유용하다. 시는 소설이나 에세이와 다르게 글이 짧은 편이라 오랜 집중력을 요하지도 않고, 한 편 한 편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갈 필요도 없다. 아이가 찾으면 같이 가서 놀다가, 또 아이가 혼자 잘 놀면 시집 중 아무 곳이나 펴서 읽으면 그만이다. 독서 흐름이 끊길 염려도 없으니 중간중간 불규칙적으로 시간이 나는 키즈카페에서 읽기에 시집만 한 것이 없는 것이다.
자리에 앉아 시 한 편을 읽고 있으면 어느새 아이가 쪼르르 다가온다. "엄마 같이 놀자" 아이는 엄마의 손에서 시집을 떼어놓는다. 그럴 때 이렇게 말하며 아이의 흥미를 끌어본다. "엄마가 지금 시를 읽는데, 한번 들려줄까?" 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 풀꽃 1
시 낭독이 끝나자 아이는 배시시 웃는다. "이건 나태주 시인의 풀꽃에 대한 시야, 여기저기 흔하게 핀 풀꽃은 그냥 지나치기가 쉬운데 자세히 보면 하나같이 예쁘고 사랑스럽대. 우리 채유처럼." 하고 말해주니 아이는 "채유처럼? 채유 사랑스럽지?" 하고 되물으며 양손으로 꽃받침을 만들고 고개를 갸웃갸웃거린다. 아, 정말 사랑스럽다. 아이의 볼을 어루만지며 뽀뽀세례를 퍼붓는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 키즈카페에서 시를 읽는 것이 내겐 '지금 이 순간 가장 확실한 행복'이 된다. 아이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엄마의 즐거움이다. 방금 도서관에서 예약한 시집이 도착했다는 알람을 받았다. 그 시집을 빌려 이번 주말 아이와 함께 키즈카페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