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조직에서 살아남기
나는 글로벌 회사에서 영어로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을 그런대로 문제없이 해내고 있다. (고 아침마다 스스로 되뇐다.) 그런데 화를 내야 하는 건지 화내는 게 오버인지 망설이게 될 때가 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지난주에 온 메일의 한 문장이 그랬다.
"Thanks for K's great effort here - He did it all by himself with his old-fashioned Start-up mindset :)"
스타트업 마인드라 좋다는 걸까? old-fashioned라니 뒤떨어졌다는 말인가? 어쨌든 여기에는 뉘앙스가 숨어 어있는 건 확실하다. :(
메일의 배경은 이렇다.
메일이 오기 전 주, 새로 한국에 출시하는 제품의 LAT (Language Acceptance Test)가 있었다.
각 나라의 현지 언어로 번역을 할 때는 두 단계로 확인한다. 우선 단어나 문장이 제대로 번역되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러고 나서 번역된 언어가 제품 상에서 보이는 것을 확인하는 것을 LAT 과정을 거친다.
LAT는 단순히 번역이 맞고 틀림을 보는 것이 아니다. 번역된 단어나 문장의 길이가 너무 길어서 보기에 어색하거나 화면이 망가지지는 않은지, 다른 문장과 어우러질 때 이상한 의미를 연출하지는 않는지 등 다양하게 확인한다. 기본적인 언어는 물론이거니와 제품에 대한 이해가 같이 있어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제대로 하려면 이렇다.
우선 제대로 LAT를 할 수 있는 역량의 사람을 찾는다. LAT의 목적과 과정을 이해시킨다. 제품에 대한 이해 정도를 확인하고 그에 따라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산정한다. LAT를 담당하게 된 사람이 테스트를 수행한다. 수행 도중 문제는 없는지 시간이 모자라지는 않는지 확인한다. 테스트 후 결과를 확인한다. 문제가 없으면 관련 부서에 넘긴다. 제대로 일을 해낸 것을 축하하는 이메일을 서로 주고받는다.
...... 헉헉.
시일이 촉박했다. 제대로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을 찾을 자신도 없었다.
결국 시간을 쪼개서 모든 일을 직접 하기로 했다. 굳이 시간을 산정하고 계획할 필요도 없다. 하고 있는 일의 시간을 쪼개서 정해진 시간 내에만 해내면 된다. 정 시간이 없으면 집에서 밤늦게까지 하지 뭐.
그렇게 정해진 시간 내에 LAT가 완료되었다. 이런 종류의 일이 끝나면 항상 서로 칭찬하는 낯간지러운 메일들이 아웃룩 메일박스 안을 날아다닌다.
"We finished this job. Thanks to everyone who helped - John, KJ, Mary, brabra...:"
"It should go to Kelvin who supported this work , brabra..."
그런 메일이 돌아다니는 와중에 혼자서 한국 LAT를 끝낸 나에게 온 메일 중에 바로 그 언급된 문장이 있었다.
뉘앙스 차이까지 세밀하게 구분하지는 못하는 실력이지만 행간의 의미는 사실 알 수 있다.
' 열심히 일해서 혼자 완료했으니 수고했긴 한데, 그렇게 혼자 일하는 게 맞을까?' - 쳇.
주어진 일을 끝냈으면 됐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글로벌 운영을 하는 회사들은 조직이나 업무가 흩어져 있다.
다양한 지역과 나라에 모든 업무 하는 사람을 모두 둘 수 없다. 마케팅, 영업, 기술인력, 지원, 백오피스 등등 필요한 모든 인력을 나라마다 둔다면 무한정 자원이 들어간다. 물론 미국처럼 큰 시장의 나라에는 모든 업무를 하는 사람이 모두 모여있다. 마치 우리나라 기업들 안에 모든 조직이 존재하듯이.
이런 조직 하에서 어떤 일을 해내려면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을 찾아내고 분배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아웃소싱(Outsourcing)을 적절히 할 수 있어야 한다.
아웃소싱이 전가의 보도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모든 기업이 아웃소싱에 혈안이 되었었다. 반면에 '역량의 내재화'란 이름으로 회사 내부에서 모든 역량을 가져가려 하던 흐름도 있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상황과 시대에 따라 그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된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능력과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해낼 일은 많다. 일을 나눠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일을 아웃소싱할 수는 없다. 나눠진 일의 방향과 품질은 보장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일은 안 하고 시키기만 하는 사람이라는 뒷담화는 덤.
가능한 한 많이 관여하되 (Engage), 중요한 핵심 일은 내용을 이해하고 직접 챙길 정도의 역량과 시간은 항상 여분으로 남겨 둘 (Save)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아웃소싱을 통한 적절한 업무의 분배를 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킹 Networking 이 필수이다. 전문화된 일과 복잡한 조직 속에서 적절한 동료를 찾고 나누기 적합한 일의 정도를 찾는 것.
외국계 회사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파티나 저녁을 스탠딩 형태로 만드는 이유다. 보다 많은 사람이 네트워킹하게 자리를 만들어 준다. (비록 우리 한국사람들은 별로 안 좋아하는 형태이긴 하지만. 우리는 소수로 소주 먹는 걸로 하는 네트워킹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나만 그럴 지도.)
SF영화의 고전 매트릭스를 기억하는지.
영화 중에서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프로그램인 매트릭스는 우리 주위에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벗어나기 어려운, 구멍을 찾기 어려운 촘촘한 망으로 묘사된다.
이 매트릭스가 회사 조직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단어 중 하나이다. 매트릭스 조직 Matrix Organization.
매트릭스 조직 형태는 제품/서비스 + 고객 영역, 기능 조직 + 프로젝트 등 다양한 디멘젼으로 구성된다. 디멘젼에 상관없이 매트릭스 조직의 목표는 하나다. 어떤 업무도 사고 나지 않고 새는 것 없이 완벽하게 만들고 싶은 것. 본질적인 목표는 영화 매트릭스의 매트릭스와 다르지 않다.
매트릭스 조직의 형태로 갈수록 업무와 함께 권한과 책임 소재도 복잡해지기 때문에 조직을 관리하거나 프로젝트 형태의 일을 리드할 때 아웃소싱과 네트워킹의 중요성은 더 커져만 간다.
여담이지만, 매트릭스 조직은 촘촘하게 구멍 없는 조직을 만드는 게 목표이지만 거꾸로 조직의 효율성을 극도로 방해할 때도 많다. 책임질 사람이 많다는 것은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글로벌 IT 회사의 경우는 매트릭스 조직을 극대화한 결과, 일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일이 성공되었을 때 이른바 숟가락 놓는 사람들만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거꾸로 거대한 매트릭스 안에서 주목 안 받고 조용히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어디나 땡보직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