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우주에서 떨어진 지령
잠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가장 첫 번째로 느껴진 몸의 변화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잠이 급격히 늘어난 건 첫 임테기를 했던 주말부터였다. 평상시에도 주중에 못 잔 잠을 주말에 몰아서 자는 것으로 잠에 대한 한풀이를 하는 유형의 인간인데, 이상하게 자고 또 자도 끝없이 잠을 잤던 주말이 변화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임신을 인지하고 나서는 회사에서 앉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집에 오면 방전된 로봇처럼 오자마자 자기 바빴다. 8시에 자서 6시에 일어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주말엔 거의 깨어 있는 시간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외관적인 변화는 없었지만 몸 안에서는 엄청난 변화에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을 테니 뭐라도 스위치를 하나 꺼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밥을 먹으면 졸렸고 씻고 나면 졸렸다. 인간이 이 정도로 잘 수 있나 싶을 만큼 자고 또 잤다.
임신 후의 몸의 변화나 준비해야 하는 마음 가짐, 조심해야 하는 음식 등등 아는 것이 전무했다. 조금만 검색을 해도 지식이 쏟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왜 이런 건 꼭 활자로 확인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우선, 근처 서점에 가서 임신에 대한 책을 한 권 골랐다.
딸의 임신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친은 내가 퇴근할 때쯤 매일 같이 전화를 해서 오늘의 컨디션을 물어보곤 했다. 다행인 건 입덧이 없던 모친을 닮아 입덧이라고 느껴지는 그 무언가는 없었다. 약간의 피곤함과 쏟아지는 잠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술꾼이었던 내가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하면, 약이 술이라는 둥, 한 잔만 마시라는 둥, 개가 똥을 끊지라는 둥의 말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저마다 권하는 술을 거절하는 것도 일이었다. 당분간의 모든 약속은 다 취소하였다.
무엇보다 문제는 회사에서 마시는 커피였다. 팀장은 매일 나에게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하는 사람이었다. 회사에 가면 아침, 점심으로 적어도 두 번의 커피를 마시는데 평소에도 우유 들어간 음료는 입에 대지도 않는 내가 마시는 음료라고는 아메리카노 뿐이었다. 그러던 내가 갑자기 어느 날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않고 차를 마신다거나, 어떤 음료도 안 마시거나 하는 걸 분명히 이상하게 여길 팀장이었다. 다음 주에 있을 팀 전체 회식도 문제였다(아니 대체 왜 코로나 시국에 전체 회식을 한다는 건지). 위염을 핑계로 삼았다. 회사에서도 이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임신을 했다고 하면… 또 얼마나 뒷 말이 많을지 아연해졌다. 아직 안심할 수 없는 단계인데 여기저기 임신했다고 알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대체 안심이라는 걸 할 수 있는 단계가 있는 건지 싶기도 하다).
위염을 지붕 삼아 대외적으로 커피와 술을 마시지 않았다. 5년을 넘게 다니던 필라테스도 잠시 홀딩을 해두었다. 책에 쓰여 있는 임신 극 초기의 증상 중에 내게 해당되는 건 피곤하고 나른한 상태의 지속이었다. 그것을 빼면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이었다. 임신한 상태라는 걸 잊고 지하철을 놓칠까 봐 뛰어다녔고, 회사에 늦을까 봐 지하철 계단을 두세 개씩 오르내리고, 집에서도 무게가 나가는 물건들을 번쩍번쩍 들고 날랐다. 조심성 없는 행동을 하고 나서야 아 그래 맞다 나 임신했지,라고 자각을 했다. 아직은 이미지로만 인지가 되는 있는 임신이었다.
21.11.24, 열흘 뒤 다시 병원.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 날이었다. 우리는 행여나, 혹여나 하는 불안함에 입 조심, 마음 조심을 하면서 결코 짧지 않았던 열흘을 보냈다. 초음파로 보이는 자궁 속에 생긴 커다란 검은색 타원이 아기집라는 것도, 그게 내 것이라는 것도 믿기지가 않는데 기계를 타고 들리는 이 소리가 아기의 심장 소리라니, 신기하기도 하고 내가 두 개의 심장이 되었다는 것에 현실감이 없었다. 되려 초음파 담당 선생님의 감사한 리액션은 눈앞에 실재하는 이 화면이 사실은 엄청난 일이라는 걸 무덤덤한 임부에게 깨우쳐주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산과로 전과를 해도 좋겠다는 담당 선생님의 소견을 들었다. 아이를 가졌다, 라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삶을 성취주의적으로 살아온 한 인간이 이제껏 그래 왔듯이 몸과 마음고생을 겪고 난 이후에 주어진 트로피처럼 느껴졌다. 내가 드디어 엄마가 되었다, 라는 단어와 문장으로 설명하기 버거운 경이로움이 아니었다. 남들에게는 아이를 가졌다, 는 사실이 그토록 바라던, 혹은 계획했던 엄마가 되었다, 라는 기쁨으로 보였는데, 나는 2021년에 일어났던 그 어떤 결과들 중에서도 가장 기쁜 결과라는 사실이, 이토록 결과 지향적인 마음이 드는 것이 괜찮은 건가 싶었다. 내 마음이 이래도 되나 싶었다.
엄마의 준비가 안된 인간에게 이제는 엄마가 되어 다른 삶을 경험하고 성장하라는 아득하고도 머나먼 우주에서 떨어진 지령 같았다.
하지만 그러기엔 여전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넘어야 할 직장인 임부에 대한 수도 없는 편견과 불안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