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년만에 심장이 반응을 멈췄다

첫사랑과의 이별

by 라프

첫사랑은 왜 그리도 오래 잊지 못하는 걸까. 못다 이룬 사랑에 대한 아쉬움은 10년을 훌쩍 넘겨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내 마음속 깊이 남아 있었다. 17살에 만나 1년간 지켜보다가 18살에 시작된 사랑은 19살을 며칠 남겨두고 끝나고 말았다. 연말연시 티브이를 보는데 삐삐 알람이 울렸다. 첫사랑이 남긴 음성 메시지다.


신치야. 나야. 더는 힘들어서 못 하겠다. 미안. 우리 헤어지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2년여의 시간 동안 첫사랑은 내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겨울 방학에 친구들과 스키장에 가기로 했다는 내 말을 듣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고선 그 녀석은 자기 친구들과 스키장에 '짠'하고 나타났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하루라도 못 보면 미칠 것 같은 그런 감정이라면 연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너무 좋아서 환호성을 지르거나 달려가서 안아주거나 잘 왔다고 칭찬을 해 주거나. 아님 여기까지 뭐하러 왔냐고 화라도 내거나… 응당 어떤 반응이라도 하는 것이 당연한데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표현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정말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친구들이 내게 말했다.


야, 너는 무슨 애인이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표정이 그게 뭐냐. 아무 반응이 없어서 우리가 더 민망하더라. 불쌍한 우리 ㅇㅇ


평소 학교에서는 '못생긴 ㅇㅇ'이라고 놀려 대던 친구들도 그 순간만큼은 첫사랑 편을 들어주었다. 깜짝 이벤트를 준비해도 시큰둥, 좋은 곳에 가도 시큰둥, 함께 있는 모든 시간들, 심지어 전화 통화를 하는 그 순간조차 그 아이가 조잘거리다가 멈추면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침묵만 하다가 전화를 끊곤 했다.


좋아해서 사귄 거지만, 내 마음이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나도 내 마음을 잘 몰랐다. 도대체 그 녀석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정말 좋아하고 있긴 한 건지… 심장이 꽁꽁 얼어붙어 있어서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는지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헤어지자는 말을 듣던 그 순간 내가 그 아이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시는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미쳐버릴 것 같았고, 숨이 막혀왔다. 네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내편이 되어준 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믿기지가 않았다. 너무나 늦게 그 아이를 내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알고 만 것이다.


사실 첫사랑을 잊지 못한 마음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건 바로 '미안함'이었다. 마음껏 사랑해주지 못한 미안함, 마음껏 고마워해주지 못한 미안함, 마음껏 표현해주지 못한 미안함, 마음껏 사랑해준 그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미안함. 온통 미안함 뿐이었다.


고등학교 때 헤어진 첫사랑과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만났다. 대학교 때 한 번,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한 번.


그리고 오랜 시간 잊고 지내다가 작년에 뭐하고 사는지 궁금해져서 SNS를 뒤지기 시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함께 아는 친구의 계정을 따라가다가 첫사랑을 발견했다. 구름 사진을 올리는 계정으로 어디에도 '나인지 알 수 없도록' 첫사랑을 팔로우하고 그의 일상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십여 년 만에 그 아이의 계정에 올라온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마구 뛰었다.

하루, 이틀 훔쳐보던 어느 날 결혼 소식을 전하는 사진과 글이 올라왔다. 과거를 함께 아는 친구들도 있었기에 대놓고 댓글을 달지는 못했다. 하지만 축하해주고 싶어 구름을 올리던 계정의 이름은 지우고 실명을 담은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몇 번을 지우고 쓰기를 반복한 축하 메시지를 첫사랑에게 보냈다.


"ㅇㅇ아 결혼 축하한다~ 행복하게 잘 살아~"


떨리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보냈고, 몇 달 후에 답장이 도착했다.


"야 이제 봤다. ㅠ-ㅠ 아이고.. 너무 늦게 답장하네^^ 고맙고 니도 어서 좋은 소식 들려주고! 행복하자~"

"ㅋㅋ 그려. 행복하게 잘 살자. 건강하고~!^^"


덤덤한 듯 보냈지만, 사실 내 가슴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리고 1년 4개월이 지난 어제. SNS에 메시지가 와서 열어봤는데, 첫사랑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시집가라. ㅋㅋ 생각 없나?"

"ㅋㅋㅋㅋ 응 생각 없다."


메시지를 발견하고 바로 답장을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내 심장이 아무 반응을 하고 있지 않았다. 쿵쾅거리지도, 떨리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게 메시지를 읽고, 또 답장을 보냈다.


비로소.. 첫사랑과의 진정한 이별의 시간이 왔나 보다.


안녕, 나의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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