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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상하는 마케터 Jan 30. 2022

미니멀리즘과 결핍에 대하여

15년지기 친구를 10년만에 만나고

엄마와 4박 5일 제주 여행을 계획하면서 일정에 놓치지 않고 넣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바로 20대 첫 직장에서 만나 오랜 시간 함께 하고 있는 15년 지기 친구를 만나는 것이었다. 7년 전 제주도로 내려가 정착한 친구를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항상 제주도에 가도 따로 개인 시간을 가질 수가 없어서 연락조차 못했는데 이번이 기회였다. 제주 항공권, 숙소 등을 예약하면서 친구에게 얘기를 했고, 날짜가 가까워져 다시 연락해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의 여행 일정 중 금요일 저녁에 그녀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챙겨간 선물


그녀에게 줄 선물을 챙겨 집에 도착했고, 갓난쟁이 때 보았던 귀여운 조카들이 벌써 초등학생이 되어 나를 반겨주었다. 그간 어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 토크가 한창 이어졌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근황까지.


친구는 여전했다. 자존감이 높아 누군가와의 인생에 자신의 인생을 비교할 줄 모르는 친구다. 매일 1시간씩 홈트를 하고 있고, 식단 조절로 둘째 아이를 낳은 후에 20킬로 가까이 쪘던 살을 다 뺐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같이 일하는 동료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영국에서 온 그녀의 동료는 신발 하나, 청바지 하나, 회사 책상에는 티슈조차 불필요하거나 자주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전혀 올려놓지 않는다고 한다. 휴지가 필요하면 화장실에 가면 되고, 스테이플러가 필요하면 그녀의 동료인 친구에게 빌려 쓴다. 그리고 10년 이상 신은 하나뿐인 운동화는 얼마 전 올레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밑창이 뜯어지는 바람에 새로운 운동화를 사게 되었다고 했다. 하나뿐인 청바지 역시 음식물이 벤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뜯어지려 해 하나 새로 장만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친구가 동료인 그녀에게 인상 깊었던 장면은 바로 이것이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올 때 남편과 부부의 짐이 라면상자 6박스가 전부였다는 것. 친구는 라면상자 6박스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과연 내가 영국으로 일을 하러 가게 된다면? 컨테이너 박스 하나를 꽉 채워가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때부터 친구 역시 집에 있는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버렸고, 핸드폰으로 어느새 예쁜 옷 등 쇼핑할 품목을 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면 동료를 떠올리며 휴대폰을 닫아 버린다고 했다.


여동생의 영향으로 나 역시 미니멀리즘에 관심이 있었지만, 큰 실천을 못 하고 있던 나. 최근 가계부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너무 많은 지출을 하고 있다고 느끼던 차여서 그런지 친구가 해준 얘기가 많이 와닿았다. 제주도에 와서 돈 쓸 일이 없어졌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물건뿐 아니라 돈에 있어서도 불필요한 지출이 너무 많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와의 만남에서 가슴에 와닿은 하나의 단어는 바로 '결핍'이었다. 제주도 출신의 커리어 성장에 욕심이 있는 그녀의 후임이 어느 날 친구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과장님은 결핍이 없어요?"

"응. 나는 없는데. 왜? 나는 나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인데, 다른 사람을 보며 결핍을 느껴야 하지?"


그런 그녀의 대답에 후배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 철학자 라캉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와의 분리에서 오는 근원적인 결핍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다. 라캉은 인간이 타인으로부터 이름을 불리며 주체가 되며, 타인으로부터 배운 언어로 욕망을 추구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유치원에서 자기 이름을 들을 때 반응하며 또래의 친구들이 '뽀로로'라고 소리 지르면 자기도 '뽀로로'라고 함께 외친다. 하지만 과연 그 순간 아이가 원하는 것이 뽀로로일까? 인간의 욕망이 능동적인 것이라 착각하지만 자신의 무의식적인 욕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기본적인 욕구인 자고, 먹고, 쉬고자 하는 욕구는 밥과 휴식 등으로 채워질 수 있으나 고급 아파트, 고급 자동차 혹은 고급 레스토랑 등에 대한 욕망은 끊임없이 타인에 의해 공급되며 욕망은 대상을 가지거나 성취하고, 마침내 경험했다고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과 인정으로 비로소 충족된다.


내 욕망이라고 하지만, 이는 곧 타인의 욕망이다. 그래서 라캉은 '나는 타자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언어의 영향권에 있는 한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무의식적 욕망이 영원히 결핍된 채 남게 된다.



라캉의 이론을 보니 친구가 했던 얘기들이 마치 구슬이 꿰어지듯 하나로 엮이었다. 만나자마자 제주도가 좋은 이유를 몇 가지 이야기했는데. 아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 서울에 있었다면 친구들과의 만남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라캉이 얘기한 타인의 욕망에 끊임없이 노출되고 있었을 텐데 제주도에 오니 그런 만남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물론 친구는 예전에 서울에 있을 때에도 주변의 친구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스타일이긴했다.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다가 몇 년 전 정말 오래간만에 선배와 후배를 만나 얘기하는데, 만나는 시간 동안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아파트와 주식이었다. 두 사람을 만난 후에 '사람들은 이런 데에 관심을 많이 가지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너무 관심이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요즘 내 인생을 통틀어 계속해서 무의식으로 반복되고 있는 나의 습관을 하루하루 비추어 보고 돌이켜보고 있는 와중이라 그녀의 이야기가 몹시 와닿았다. 어찌 보면 내 인생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나의 습관이 이 '결핍'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주변의 누군가에게 정보든 뭐든 주고자 하는 오지랖, 한 회사에  정착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안정기에 오르면 어김없이 끓어오르는 이직의 열망, 그리고 박차고 나와 다시 방황을 시작했던 오랜 시간 반복된 나의 습관, 이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더 나은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환상으로 인해 '지금'에 집중하지 못하는 습관과 맞닿아 있다. 나도 모르게 내 속의 꿈틀대고 있던 커다란 어떤 '결핍들'과 그로 인한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을 채우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타인의 인정에 대한 목마름이 내 마음을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듯하여 아차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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