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취미 부자였다. 꽃꽂이, 요리, 테니스 등 초등학생 3명의 아이들이 있어도 바쁘게 엄마가 하고 싶은 것들, 배우고 싶은 것들을 하러 바쁘게 다녔다. 어제 가족 통화에서는 그나마 셋 중에 엄마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얘기하는 편이었던 여동생이 고등학교 때 친구를 만나 본인이 학교 다닐 때 일주일 정도 왕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엄마가 그런 힘든 일이 있었는데 왜 엄마에게 얘기를 하지 않았냐고 한 것이다.
"엄마는 늘 바빴어. 내가 얘기를 해도 관심을 기울이고, 자세히 들어주지도 않고, 무덤덤하니 별 리액션이 없었거든. 그래서였나? 엄마한테 점점 얘기를 안 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 힘든 일이 있어도 그냥 내가 이겨내야지라고 생각했어."
돌아보면 나도 여동생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초등학생 때 어느 여름날 달려가 엄마의 손을 잡았을 때 엄마가 내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엄마 손 잡지 마. 엄마는 붙는 거 싫어해"
그래서 그 이후로는 엄마와 손을 잡거나, 안거나, 칭얼대는 것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뭐 그리 칭얼댈 일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엄마와 사이가 좋았던 시기였는데, 치킨집을 늦게까지 했던 엄마와 야자를 마치고 늦게 집에 도착한 나는 맥주 한잔씩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고3 주말에는 엄마와 함께 대형 마트에 가서 먹고 싶은 맥주를 사는 게 낙이었던 것 같다.
고3 수험생과 술을 마실 정도로 자유분방한 엄마였다. 엄마에게도 꿈이 있었다. 어릴 때는 체육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대학에 가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큰 이모, 큰 외삼촌, 엄마 그리고 작은 외삼촌 이렇게 4남매였는데, 나이 차가 적은 외삼촌 대학 보내느라 엄마까지 대학에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엄마는 우연히 어린이 책 파는 일을 했다. 당시 한 달 평균 월급이 몇십만 원일 때였는데, 엄마는 출판사에서 영업을 잘해 몇 백만 원씩 벌었다고 한다. 그때 대구로 시집갔던 이모가 엄마에게 중매를 제안했다. 이모 동네에 사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당시 할아버지 할머니는 가족 사업을 하고 있었다. 부잣집 7남매 중 여섯째 아들과 선을 봤고, 엄마는 그때 아빠와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아빠는 사고를 당했다. 뇌를 다쳐서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여러 번의 수술과 엄마의 간호 덕분에 아빠는 몇 년 만에 깨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사고 이전과 같은 생활은 불가능했다. 한쪽 다리가 짧아졌고, 뇌를 다쳐서 다친 뇌와 관련한 기능이 약화된 것으로 보였다. 회사 일을 하다가 다쳤으므로 산재에 해당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매달 우리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주셨다.
고등학생 시절 아빠는 친구들과 낙동강 상류에 가서 뗏목을 만들어 타고 내려온 적이 있다. 그때 사진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그만큼 아빠는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활동적이었던 사람이 매일 집에만 있으니 얼마나 갑갑했을까. 그래서 아빠는 할 수 있는 사회활동을 찾아서 계속 시도를 했다. 택시 기사, 과일 장사 등등. 하지만 매 번 일을 할 때마다 아빠가 원하는 대로 잘 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불만, 집에만 있으면서 생기는 갑갑함 등에서 생기는 불만을 엄마에게 다 풀었다. 그래서 나와 동생들은 오랜 시간 아빠의 가정폭력을 보며 자라야만 했다. 아빠의 가정폭력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바로 엄마에게는 테니스를 치고, 꽃꽂이나 요리를 배우는 등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엄마에게도 숨 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갑자기 아빠가 돌아가셨다. 1층에서 치킨 가게를, 2층은 우리 집이었는데,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 고3이었던 남동생이 집에 돌아올 때까지 2층에 혼자 올라가지를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집을 정리하고 나와 여동생이 있던 서울로 왔다.
대학생 딸 둘, 고3인 아들. 여동생과 나는 둘이 누우면 꽉 차는 고시원에 살고 있었다. 서울에 오자마자 엄마는 서울에서 단칸방 보증금이라도 벌기 위해 일본으로 일을 하러 갔고, 남동생은 우리 고시원의 남자방에 살았다. 서울에 와서 엄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임대아파트를 신청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일본에 간 사이에 임대아파트에 당첨됐다는 연락이 왔다. 입주일에도 엄마는 일본에 있었고, 나는 학교 동기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아파트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고시원에 살던 우리에게 아파트는 그야말로 궁궐이었다. 창을 열어두면 시원한 바람이 드나드는 7층. 위치도 딱 좋았다.
집이 마련되고, 얼마 후 엄마가 일본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밥벌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들딸을 위해 엄마는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식당 보조', '청소' 같은 일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일은 하기 싫다고 했다. 다행히 대구에 있을 때 할머니가 사 주셨던 소형 화물차가 있었고, 엄마는 그 차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고속버스로 오는 물건들을 배달해 주는 고속버스 택배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엄마는 다 큰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노동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 여자가 택배 일을 한다고 하면 하나 같이 이렇게 물었다.
"힘들지 않아요?"
그러면 엄마는 대답했다.
"당연히 힘들지. 그런데 재미있어."
엄마는 서울, 경기 구석구석 엄마가 몰랐던 곳들을 배달 때문에 다니면서 탐험하고 모험하듯이 즐거워했다. 엄마에게 공황장애가 와서 운전하기가 힘들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건강이 나빠지고, 운전이 위험한 상황이 되었을 때 남동생은 엄마에게 일을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다.
어찌 됐든 아이들이 돈을 벌기 시작해서 엄마를 조금씩은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이 되어 엄마는 일을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건강을 좀 회복하고 엄마는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동양화를 그렸다. 한 번은 동양화 입시 준비를 하는 학원에 가서 배우기도 했다. 지금도 엄마는 그림을 그린다. 30년 이상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 했던 테니스도 여전히 치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사이버대학교 학생이 되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4년 중 1년 반동안 학생으로서 살아오고 있다. 공부 역시 힘들지만 재미있다고 한다.
얼마 전 나는 동양화를 전공하는 지인의 딸이 전국 미술 공모전에 입상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서 읽었다. 그리고 가족 단톡 방에 관련 링크를 공유하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이런 공모전이 많은 가봐. 엄마도 내년에 준비해 보면 좋을 듯. 김ㅇㅇ 화백님 정식데뷔 한번 해 봅시다!"
며칠 후 엄마가 답장을 했다.
"알았어. 내년에 해볼게. 인정. 고마워"
아. 근데 나는 왜 엄마의 쓴 저 '인정'이라는 두 글자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려고 했을까. 지금까지 늘 엄마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인정받으려고 그렇게 발버둥 치며 살아왔는데. 엄마 역시 그런 마음이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무뚝뚝한 큰 딸은 이번 가족 통화 끝에 남동생이 "I love you, mom" 뒤이어 여동생도 "사랑해 엄마~"라고 할 때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도"라는 말이라도 한마디 할 걸 그랬나 금세 후회할 거였으면서 말이다. 엄마에게 기회가 된다면 꼭 얘기해 주고 싶다.
"엄마, 그동안 잘 살아내주어서 고맙고 정말 고생 많았고, 애썼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