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아빠는 나를 포함한 아이 셋에게 학교 갈 때, 그리고 다녀올 때 인사를 하지 않으면 엄하게 혼냈다.
"엄마아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엄마아빠, 학교 다녀왔습니다."
반대로 아빠가 집에서 나갈 때, 그리고 다녀올 때 인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빠, 다녀오세요."
"아빠, 다녀오셨어요?"
라고 인사하는 것 말이다. 아빠를 무서워하고 말을 잘 듣는 초등학생 때까지는 그래도 아빠 말을 곧잘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춘기가 오고, 아빠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더 커지면서 이런 인사가 점점 희미해져 갔던 것 같다. 물론 일찍 나가거나, 아빠가 잠든 후에 들어와서 마주칠 일이 더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밥을 먹기 전에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
매년 생일에 온 가족이 모여 생일 케이크에 불을 켜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축하해 주는 것
학교에 가면 매일 아침 조회를 하고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는 것
이런 "특별한 의미가 담긴 반복적인 행복"을 한병철 교수의 책 <리추얼의 종말>에서 '리추얼'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행동들은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워주고, 함께 하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요즘 빠르게 변화하고 SNS를 통한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함께 하는 느긋한 의식 같은 행동'보다 '혼자 빠르게 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면서 리추얼이 사라지고 있다(종말)고 저자는 말한다.
리추얼이 규정하는 사회에서는 우울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에서 영혼은 리추얼 형식들에 완전히 흡수된다. 그야말로 영혼이 텅 비게 되는 것이다. (중략) 우울에 빠진 사람은 자기에게서 벗어나 세계로 건너갈 능력을 완전히 잃고 자기 안에 은둔한다. 세계는 사라진다. 고통스러운 공허감 속에서 그는 고작 자기 주위를 맴돌 뿐이다. 반면에 리추얼은 자아가 자기라는 짐을 내려놓게 해 준다.
돌아보면 평생 '우울증 약'을 먹었던 아빠의 우울증이 심각해지기 시작한 때는 아이들과의 '리추얼'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하면서였던 것 같다. 아빠가 매주 '가족회의'를 하고 싶어 했던 것도 어쩌면 아이들과의 이런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또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반대로 지금 우리 가족이 매주 한 시간 이상 '가족 통화'를 하는 것이 아빠가 그토록 원했던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함께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