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선미는 지나를 무서워했다. 지나의 말이라면 무조건 듣는 편이었다. 영어, 수학, 수영, 스케이트, 스키, 보드 등 배우라는 것도 대체로 다 배웠다. 하지만 머리가 크고 사춘기가 오면서 여느 아이들처럼 선미도 지나에게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에 갔던 독서 토론 모임을 가지 말라는 지나의 말에 선미는 울면서 싫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결국 이제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에 가야 하는데 독서 토론회는 시간을 많이 빼앗길 거란 지나의 말에 설득당하고 마는 선미.
책 보다 사람이 좋아서 독서토론 모임에 가고 싶었던 선미는 고3 내내 독서토론회에 가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고등학생 때 이런 활동을 하지 못해서 대학 입학 후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미가 할 수 있는, 해 보고 싶은 거의 모든 활동에 참여했다. 과 안에서 하던 여성문제 연구학회에 들어갔고, 드럼이 배우고 싶어 음악동아리에 들어갔다. 여성문제 연구학회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총여학생회와 친하게 될 기회가 생겨 총 여학생회 활동도 하게 된다. 총 여학생회 활동을 하다 보니 외부의 여성운동을 하는 단체를 알게 되어 외부 활동까지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2학년 때였나, 과 선배 중에 자연대학연구소 소속으로 공부를 하는 선배가 있었는데, 왠지 거기도 재미있어 보여 지원했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독서실 같이 생겼던 자연과학연구소에서 공부하는 척했던 기억도 난다.
정말 대학 시절은 선미가 평생을 바라 왔던 가족과 헤어져 혼자 지낼 수 있었던 선미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하루 24시간의 시간을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온전하고 오롯하게 선미 마음대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이 정말 소중했다. 여느 아이들처럼 '대학 하나만 보고 모든 것을 감내한 지난 시간'을 보상받듯이 선미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 보고 싶은 거의 모든 활동을 했다.
십여 년이 지나 누군가 선미에게
그래서 그 시간들이 네게 무엇을 남겼니?
라고 묻는다면
글쎄요. 특별히 남은 건 없네요.
라고 답할 수 있다. 다양한, 어쩌면 주먹구구식으로 일관성도 없고, 깊이도 없는 활동들로 인해 전공 공부에는 몹시 소홀했고, 그로 인해 3.5도 안 되는 아주 낮은 졸업 학점이 낮았다. 졸업 후 좋은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스펙 관리'가 필수이던 시절이었음에도 선미에게 '스펙 관리'란 딴 나라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막연하게 다양하게 한 활동이 취업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선미가 했던 활동이 여성 단체나 NGO 등에는 적합할지 모르나, 일반 기업에 취업할 때는 크게 어필할 것이 없었다. 어찌 됐든 기업은 어떤 분야에서 스페셜리스트가 될 만한 인재를 찾고 싶어 하고, 그렇게 연봉을 주며 키우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대학의 전공 공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하기 때문에.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는 선미가 통계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취업과 연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누군가가
그래서 그때 그렇게 다양한 활동을 한 걸 후회해?
선미에게 지금 이렇게 묻는다면
아니. 활동했던 걸 후회하지는 않아. 다만 전공 공부는 조금 더 성실하게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긴 해.
수업시간에는 열심히 들었지만, 과제를 스스로 힘으로 풀어 본 적이 없는 선미. 몸 담고 있던 여러 가지 활동에 온갖 시간을 빼앗기다 보니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수업 시작하기 얼마 전에 친한 친구나 선배에게 부탁해 과제를 베꼈다. 시험공부도 대충대충 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데 그냥 대충 답안을 작성했고, 그나마 교수님들이 예쁘게 봐주셔서 그 3점이라도 넘은 거라고 생각했다.
전공을 살려 취업하지 않아서 큰 의미는 없었겠지만,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더라면 선미의 삶은 지금과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평범한, 어쩌면 지나가 바라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첫 직장에서 4년 5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10년 만에 1년 이상 게다가 3년을 꽉 채우고 4년 차에 한 직장에 몸담고 있는 선미. 지금도 선미는 안정적인 회사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을 하려고 호시탐탐 다른 곳에 이력서를 내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이제 나이가 많아져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는 게 쉽지는 않지만 말이다. 안정과 변화라는 키워드 사이에서 늘 변화를 향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회사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꿈꾸는 선미.
늘 새로운 것을 좇는 건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한 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지금 여기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현실에 집중하지 못하고 미래를 좇다 보니 현실에 대한 불만이 컸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환경까지 모든 것들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에 대해서나 환경에 대해서나 불만이 없다. 아주 만족스럽게 잘 지내고 있다.
첫째인 선미에게 가장 많은 투자를 했다. 어릴 때부터 안 시킨 것이 없고, 남들보다 못하게 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넘치게 가르쳤다. 그래도 선미가 중학교에 갈 때 까지는 집안 형편이 넉넉한 편이라 가르치고 싶은 건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가르치려는 것마다 선미가 잘 따라와 줘서 감사한 마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선미만큼은 아주 크게 될 줄 알았다.
파일럿에 되겠다고 할 때 내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정말 파일럿이 되길 바랬는데, 첫 직장 이후 카페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속이 상해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내가 저걸 커피나 팔라고 그렇게 키운 게 아닌데'
하고 말이다. 그래도 요즘은 회사에 멀쩡히 잘 다니고 있고 용돈이라도 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예전에 한 철학관에서 아이들 점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선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큰 애는요. 총명해서 알아서 다 잘할 거예요. 걱정 마세요.
중간중간 어려운 시절이 있었지만, 나 역시 선미가 잘 살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