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못 버리는 지나씨

by 라프

# 고시원에서 이사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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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건 학생이사가 아니잖아요? 4인 가족 이삿짐인데??


아빠가 돌아가시고, 선미와 동생들은 서울에 있는 고시원 두 개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운이 좋게 아파트로 이사를 갈 수 있게 되었다. '학생이사'라고 말씀드리고 이삿짐 아저씨를 불렀는데 트럭에 산더미처럼 쌓인 짐을 보고 아저씨가 했던 말이다.


여동생과 선미가 함께 쓰던 방에 있던 물건과 남동생 혼자 쓰던 방 안에 있던 물건들만 실었다면 아주 단출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구 집을 정리하고 이사 올 때 20여 년간 살았던 대구 집에서 지나가 보내왔던 짐이 건물 지하주차장에 쌓여 있었다. 거기에는 식당용 주방기구부터 치킨 배달할 때 쓰던 오토바이까지 '언젠가는 쓸지도 모르는 물건들-하지만 몇 년째 존재조차 잊힌 물건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짐들이 7년째 살고 있는 좁은 고시원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 지나의 방

지나가 혼자 쓰는 아파트의 큰 방 한쪽 벽은 옷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옷 중에 1~ 2년 이상 세상 구경을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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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이란 책에서는 보통 우리가 가진 옷의 20%의 옷만 입는다고 하는데, 지나는 10% 정도만 입는 것 같다. 그 많은 옷들을 두고 지나는 계속 옷을 하나씩 사 왔고 그나마 한 두 번 입던 옷들도 벽장 속으로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집에 있던 빨래 건조대가 망가져서 선미는 새로운 물건을 주문했다. 물건이 도착하자마자 조립을 하는데, 지나가 고장 난 건조대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선미는 지나에게 이유를 물었다.

이불 빨래할 때 써야 해.


그래서 선미는 새로 산 건조대가 꽤 크고 넓어서 이불 널기에 충분하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결국 엄마와 딸의 대화는 말다툼으로 번지고, 망가진 빨래 건조대는 결국 티브이 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 버리려는 딸 vs 지키려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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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물건을 사면 기존의 하나는 버려야 한다는 선미의 생각과 달리 지나는 늘 '언젠가 쓸 일이 있다.' 혹은 '버리고 나면 꼭 쓸 일이 생긴다'는 생각으로 절대 버리지 못한다. 그렇게 좁은 집이 하루가 다르게 더 좁아지고 있었다. 사람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보다 몇 년째 사용하지 않은, 심지어 존재조차 잊어버린 물건들이 차지하는 공간이 훨씬 더 많았다.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이란 책에서는 집안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이 사람의 기를 가로막고 있다고 하는데, 선미는 이에 매우 공감했다. 집안 곳곳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물건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면서, '이 집에서 얼른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결국 선미는 견디다 못해 내 물건이라도 정리하자는 마음으로 옷, 책, 가방 등 쓰지 않는 것들은 모조리 버리고, 겨울 옷도 주로 입은 옷들만 옷장 속에 남겨두었다. 그렇게 작은 방만이라도 깨끗하게 치우고 다시 선미만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지나의 물건들을 몽땅 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대청소를 하면서 선미 마음대로 지나의 물건을 버리고 여러 차례 싸운 적이 있어 다시는 지나의 물건은 함부로 버리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였다. 이렇게 마음을 먹은 후에 세탁기와 에어컨을 수리할 일이 있어 선미는 에어컨이 놓여 있는 베란다에 있는 물건들을 대충 치웠다. 기사님이 다녀가 신후 지나가 격앙된 목소리로 선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베란다에 있던 대추 왜 버렸어? 호박 말린 건? 그건 또 왜 버렸어?
넌 그게 니 눈에 보이지 않던?
그거 지금 사려면 만원이 넘는다고!
니 돈 안 든다고 이렇게 막 버릴 거야?


라고 다짜고짜 화를 버럭 내는 지나.


선미는 본 적도 없는 대추를 왜 버렸냐고 화를 내는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찾아보고 없으면 돈을 물어내라는 지나의 말에 맘대로 하시라고 얘기하고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화를 내던 엄마는 온 데 간데없고, 맛있는 찌개 끓여놨다며 빨리 밥 먹으라고 웃으며 전화를 한 엄마가 있었다.


선미에게 찾아내라고 했던 것들을 냉장고 냉동실에서 찾은 것이었다.




할머니 장례식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마침 장례식장이 20년 가까이 살았던 옛날 집 근처였다.

엄마 우리 옛날 집 한번 보러 갈까?

하고 선미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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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꼴도 보기 싫어

라며 지나는 고개를 저었다. 20년 가까이 아빠와 함께 살면서 옛날 집에 대한 추억의 대부분은 '행복'보다는 '불행'이었을 지나.


물건에는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의 기가 담긴다고 한다. 그렇게 몸서리치게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이 담긴 그 시절의 물건들이 지금 지나의 집 곳곳에 너무 많이 쌓여 있었다. 선미는 지나의 나쁜 기억들이 담긴 물건들을 버리고, 지금 지나가 살고 있는 공간이 완전히 새롭게 변해서 지나의 행복한 기운으로 가득 채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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