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아 그린, <옳고 그름>
조슈아 그린의 <옳고 그름>을 읽었다. 현대 사회는 여러 가지 도덕관을 지닌 집단이 충돌하고 있다. 저자는 집단 간 갈등을 해결할 방법으로 공리주의 (저자의 표현으로는 깊은 실용주의)를 제시한다. 대부분 책은 독자가 보지 못했던 현상을 보여주고 어떻게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분석하는 지점에서 그친다. 하지만 이 책은 현상을 분석하는 단계를 넘어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인간의 도덕성은 진화의 산물이다. 서로 협력하는 집단의 생존율이 높았기에 ‘도덕관념’이 생겼다. 문제는 도덕관념이 집단 내에서만 통하도록 진화했다는 점이다. 내집단과 외집단을 차별하는 성향은 여러 가지 심리 실험으로 입증되었다. 게다가 도덕관념은 집단마다 조금씩 달라 집단을 통합하기도 어렵다. 우리 사회만 봐도 그렇다. ‘소수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국가’·’ 동물권’·‘사유재산’ 등 따옴표 안에 들어갈 가치관은 차고 넘친다. 우리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과 부대껴 살아간다. 내 신념은 견고하고 증거가 넘치는 반면 적의 생각은 신념이라 부르기도 지리멸렬하다. 그렇다고 자신의 신념을 그대로 내세우다가는 갈등과 전쟁만 돌아올 뿐이다.
저자는 해결책으로 어떤 신념 대신 공리주의를 제시한다. 공리주의는 행복, 경험의 질을 최대로 하자는 사상이다. 공리주의에서 누군가의 행복은 다른 누구의 행복보다 특별하지 않다. 공리주의가 전 세계의 공통 도덕 윤리가 되기는 부족해 보일 수 있다. 공리주의가 잘못되어 보이는 이유는 공리주의가 우리의 ‘직관’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관이란 생존하기 위해 진화한 인지 능력일 뿐, 도덕적 기준이 될 수 없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온갖 사고 실험을 가져와 독자의 직관을 시험한다. 책을 직접 읽는 즐거움을 위해 내용을 여기 옮기지는 않겠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공리주의를 이용해야 하는가? 모든 경우에 공리주의를 적용할 필요는 없다. 대부분은 우리에게 내재한 ‘도덕적 직관’을 이용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관광지 소매치기가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며, 위독한 할머니 곁을 지켜드리는 선택도 옳다. 공리주의를 꺼내야 할 순간은 ‘논쟁’이 생겼을 때다. 서로의 가치관이 충돌했을 때, 내가 옳은 이유를 허공에 외치는 대신 결과가 일으키는 경험의 질을 계산해야 한다.
저자는 낙태를 예로 든다. 낙태가 불법이 되면 많은 사람들은 성관계를 줄인다. 동시에 세상에 더 많은 아이들이 태어난다. 평범한 사람들이 성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잃는다. 세상에 태어날 아이들이 그보다 더 많은 행복을 얻을지 모른다. 하지만 원치 않은 임신으로 말미암은 다수의 아이들의 행복과 준비된 가정에서 태어난 소수의 아이들의 행복을 1대 1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다수의 금욕이라는 불행을 막기 위해 낙태를 허용하는 편이 옳다. 이 논증에는 태아의 생명권이나 여성의 선택권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 저자는 권리는 각자의 옳은 느낌을 도덕적 실체인 양 포장하는 도구라고 설명한다. 논쟁에서 ‘권리’는 논쟁하는 상대 앞에 긋는 금일 뿐이다.
사람의 본능과 직관은 바뀔 수 없는 양 특별해 보인다. 하지만 역사 상으로도 인류는 본능을 이겨낸 적이 있었다. 고대 로마나 이슬람 제국은 외집단을 배척하는 본능을 이겨냈다. 로마인들은 야만인들이 믿는 신을 신전에 초대했다. 이슬람 제국은 이교도를 살려주었다. 외부인을 배척하는 대신 관용한 대가로 둘은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현대의 우리라고 직관에 묶일 법은 없다. 나를 뺀 모두가 잘못된 길을 간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이럴 때 마냥 조소하기보다 공리주의 관점에서 사람들의 선택을 해석해보자. 그들을 설득할 근거가 하나 생길지도 모른다. 혹은 스스로에게 설득되거나. 이 또한 좋은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