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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Jan 27. 2020

세상에 피어나는 감정을 그리다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서평

며칠 전 포항에 갈 일이 있었다. 광명역에서 탄 KTX 열차는 쏜살처럼 나아갔다. 안내 방송은 천안아산, 대전, 동대구를 지날 때마다 승객들이 내릴 준비도 할 새 없이 흘러나왔다. 열차가 역을 지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포항 도착 시간을 예상했다. 예상은 틀렸다. 경주를 떠난 열차는 종착역 포항까지 공간이 늘어진 양 나아가지 못했다. 체감 상 대전에서 동대구까지 걸린 시간과 동대구에서 포항까지 걸린 시간이 비슷할 정도였다. 알고 보니 경부선이 나뉘어 있었다. 광명역에서 신경주 역까지는 시속 305km까지 달리는 고속철도 전용선이, 경주에서 포항까지는 시속 250km까지만 달리는 개량선이 놓여 있었다. 공간은 그대로인데 속도가 달라지자 거리감이 바뀌었다.


어쩌면 작품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작가 김초엽이 KTX 열차를 타며 느낀 거리감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김초엽 작가는 포항 공대를 나왔다. 이따금씩은 포항에서 서울 가는 KTX를 탔을 것이다. 철길의 종류에 따라 속도가 변하고 거리마저 바뀌는 열차 속에서, 그는 공간에 무관하게 늘어나고 줄어드는 거리감을 느꼈으리라. 열차가 사람이 적은 역을 서지 않고 지나칠 때면 그의 상상력은 폐쇄된 간이역의 외로움까지 닿았을지 모른다. 빛과 외로움을 오가는 그의 감수성에 과학 기술인 워프 항법과 냉동 인간 기술을 끌어오는 것은 오히려 쉬웠을 것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완성된 과정을 거슬러 짚다 보니 열차는 어느덧 포항에 도착했다.


소설가 김보영은 에세이 「SF를 쓴다는 것」에서 좋은 SF가 지니는 다층성을 소개한다. 김보영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러 갔다. 그는 영화를 본 후 어머니가 영화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상대성 이론과 블랙홀을 재현한 영화가 어머니에게 너무나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김보영의 어머니는 영화에 감동하고 돌아왔다. 어머니에게 <인터스텔라>는 딸을 만나러 가는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딸을 위해 세상을 구한 아버지는 할머니가 된 딸과 마주한다. 중력과 블랙홀이 어떻게 시간을 뒤섞었는지는 어머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SF를 쓴다는 것」이 들어있는 『한국 창작 SF의 거의 모든 것』


김초엽의 소설은 다층적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작품 각각에는 여러 가지 과학 개념과 미래 기술이 등장한다. 그와 함께 마음이 마음을 만나며 피어나는 감정을 이야기한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의 릴리는 '유전체 조작으로 최고의 아이를 만드는 바이오 해커'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클론에서 자신과 똑같은 결함을 발견한다. 처음에 릴리는 바이오 해커로서의 자기 인생마저 부정할 만큼이나 아이의 결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를 살리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결함마저도 인정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의 감정은 '결함이 없는 인류'대신 '서로를 밟고 위에 서지 않는 인류'가 살아가는 낙원을 만들었다. 순례자들은 모든 이의 존재를 존중하며 살아가도록 조작된 신인류였다. 이들이 차별과 혐오가 가득한 세계를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결국 순례자들 몇 명은 불완전한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 낙원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다. 


「공생 가설」 속 인류는 '브레인 머신 인터페이스'로 아기들 머릿속의 외계인을 찾아낸다. 외계인은 인류의 기술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존재이지만, 이들이 갖는 감정은 인류와 다르지 않다. 외계인이 아기의 머리에 있던 이유는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아기들은 품 속 외계인에게서 공감과 사랑을 배웠다. 류드밀라는 외계인이 차마 떠나지 못한 아이였다. 류드밀라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이유, 사람들이 류드밀라의 그림에 끌리는 이유 모두 외계인이 류드밀라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관내분실」에 나오는 '마인드 업로딩' 기술은 현실 속 뇌과학에서 말미암았다. 작중 '마인드'는 '수십조 개가 넘는 뇌의 시냅스 연결 패턴'을 시뮬레이션한 결과물이다. 신경 세포의 연결망을 다루는 현실 과학 '커넥톰'이 나아간 개념이다. 마인드 도서관의 사서와 연구원이 설명하는 '마인드'는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것처럼 구체적이다. 설명이 무색하게도 딸 지민은 엄마의 마인드를 좀처럼 이용하지 못한다. 관내분실, 엄마의 마인드 주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민은 엄마의 마인드를 찾기 위해 인간 김은하가 엄마가 되기 전의 인생을 되짚는다. '마인드' 기술은 소설의 말미에서야 구현된다. 지민이 김은하의 유품을 찾아낸 후, 그를 진심으로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이다. 


「감정의 물성」은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지만 주제 의식은 일관적이다. 지금껏 현실과 다른 세상에서 감정을 따르는 인물을 그리던 작가는, 동시대를 배경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에게도 공감받지 못한 채 물건에 마음을 쏟는 인물을 그린다. 배경은 인스타그램이 나오는 현대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믿고 행동하는 대신, 돈을 주고 '감정의 물성'이란 물건을 사고서 그에 매달린다.  '감정의 물성'은 사람을 위로하는 신비로운 힘이 깃든 양 보이지만, 물건의 정체는 고작 마약이었다. 독자는 이 이야기를 공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조금씩 사람 대신 물건에 마음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름다운 이세계 이야기 가운데 「감정의 물성」을 배치함으로써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김초엽의 SF는 시대와 공간과 종족을 넘어서도 존재하는 가치를 역설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모든 작품의 핵심에 공감이 있다. 소설에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기술과 배경이 나오지만, 주체는 소설 속 상황에서도 공감을 놓지 않는 선한 마음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독자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에 동질감을 느낀다.


김초엽의 SF에 나타나는 다층성에는 위계가 없다. 1950년대 황금기였던 클래식 SF는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하드 SF의 계보를 만들었다. 하드 SF 속에서 구현된 과학 기술은 자체로 이야기의 원동력이 된다. 반면『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기술을 행하는 마음이 이야기를 이끈다. 


김초엽은 과학기술을 주제를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하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작품은 현실을 가상에 비유한 이야기에서 그쳤을 것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그리는 감정은 세계를 초월하지만, 동시에 과학기술과 얽혀 분리할 수 없다. 이야기 속 인물이 느끼는 감정과 동기는 작가가 상상한 미래와 우주 없이는 생겨날 수 없었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중 판트로피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부분은 재경 이모에게 쏟아지는 혐오만큼 중요하다. 고통을 동반하는 인체 개조 과정이 나오지 않았다면 독자는 재경 이모가 얼마나 자유를 원했는지 공감할 수 없다. '우주의 반대편'이라는 개념 없이는 영웅이 되겠다는 가윤의 열망이 와 닿지 않는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먹먹한 이유는 우주적 규모에 있다. 이야기가 KTX가 지나친 간이역에서 일어났다면, 작품집 전체에서 가장 아득한 문장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이라는’ 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커버 사진 출처: NASA (https://www.nasa.gov/multimedia/imagegallery/iotd.html)

책 표지 출처: 알라딘 (https://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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