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보던 학습지나 단어장 한 꼭지에는 쉬어가는 페이지라며 이런 말이 꼭 있었다. 물은 100°C부터 끓는다. 지금 물이 99 °C까지 뜨거워졌어도 마지막 1°C를 더하기 전까지는 끓지 않는다. 99°C 물은 0°C나 진배없다. 지쳐 포기하는 지금, 너는 99°C일지 모른다. 팔팔 끓을 그 순간을 위해 노력을 놓지 말라.
틀린 비유다. 물은 100°C에 이르기 한참 전부터 끓는다.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여도 100°C라고 딸깍하며 꺼지기 전에 물은 이미 끓고 있다. 과학철학자 장하석은 아예 냄비에 온도계를 넣고 온도를 재어 보았다.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에 나온 실험 결과를 보면 1 기압에서 거품이 수면을 뚫고 나오는 온도는 95°C였다. 수온은 열을 가할수록 계속 오르다가 100°C에 이르러 일정해졌다. ‘끓기 시작한다’를 성공의 비유로 본다면 99°C 물은 0°C 물에 비해 충분히 성공했다.
‘물이 100°C부터 끓는다’는 말에는 또 한 가지 허점이 있다. 이 비유는 물이 팔팔 끓어야만 성공했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 실제로 100°C 물만 쓸모 있을 리 없다. 라면을 먹을 때야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지만, 80-90°C 물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차를 마실 때다. 차에 펄펄 끓는 물을 붓다가는 우러나기도 전에 익어버린다. 맛있는 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물이 끓기 전에 불을 꺼야 한다.
‘물이 100°C부터 끓는다’는 비유는 존재만으로도 폐를 끼쳐 왔다. 작게는 과학 꿈나무들의 관찰 기회 하나를 없앴다. 물이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다는 사실은 라면만 끓여도 알 수 있는데, 하도 ‘물은 100°C부터 끓는다’고들 하니 우리는 현상을 보지 못하고 컸다.
그보다 나쁘게는 겉으로 보이지 않은 노력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인식을 불어넣었다는 점이다. 99°C 물이 0°C 물과 같지 않듯, 완성되지 않은 노력은 헛수고가 아니다. 100°C 물의 비유는 모 아니면 도식 사고방식은 도전을 꺼리는 소심한 완벽주의자만 키운다.
100°C 물이 필요할 때가 있고 90°C 물이 필요할 순간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노력도 100을 들일 때가 있고 90을 들여야 할 때가 있다. 어떤 노력은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힘을 줄여야 한다. 펄펄 끓어야만 인정받는 노력은 열이 딸려서 그쳤을 때 자책과 기억만 남길뿐이다.
세계가 약육강식 싸움판으로 보여야만 이득을 챙기는 자칭 현실주의자들은 비유가 잘못되었다고 메시지가 틀린 것은 아니라 외칠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완성되지 않으면 안 하느니만 못한 일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실패를 분석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물은 100°C부터 끓는다’며 다른 사람이나 스스로를 질책하기 전에 좀 더 ‘자연스러운’ 비유를 찾아보자. 예를 들어 물의 비열은 1 cal/g이다. 철(0.11 cal/g)이나 알코올(0.58 cal/g)등 다른 물질보다 월등히 크다. 물이 99°C가 되었다면 거기까지 이르는데 큰 에너지를 들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