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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Feb 19. 2020

인간의 오만과 나의 오만

칼 세이건의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감상

과학책방 갈다가 주최한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함께 읽기 행사에 참여했다. 혼자서는 절대 안 읽었을 책이었다. 700페이지짜리 칼 세이건의 진화생물학 책이라니. 내게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의 저자일 뿐이었다. 천문학자가 진화생물학에 대해 글을 썼다니 탐탁지 않았다. 동시에 탐탁지 않은 나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읽기도 전에 책에 대해 판단을 끝낸 스스로의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 (알고보니, 칼 세이건은 천문학자이면서 외계생물학자였다. 스탠포드 의대에서 유전학 조교수로 일했던 경력도 있었다.)


책의 저자인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 (https://www.discovermagazine.com/)


책은 인간의 조상을 찾아 나선다. 인간의 조상이란 지구에 존재했던 인간 이전의 모든 생명을 의미한다. 우주에 지구가 생겨나고, 원시 생명체가 태어났다 멸종하기를 반복한다. 생명체가 산소를 내뿜자 지구는 더 이상 새로운 유기체를 만들 수 없었다. 이로서 생명이 생명을 낳는 긴 사슬이 시작되었다. 


생명의 사슬을 논하며 『종의 기원』이 안 나올 수 없다. 『종의 기원』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사람들이 진화론을 납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보다 종교의 위력이 훨씬 강한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훌륭한 사상은 그것과 마주한 사람을 설득하는데 성공해 지금에 이르렀다.  


생명은 점차 복잡해진다.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자손을 남기기 위해 유성 생식이 생겨난다. DNA에는 생존 전략을 각인한다. 다른 종을 잡아먹고, 같은 종과 경쟁하라는 내용이다. 무리로 행동하는 생명체가 나타난다. 무리 안에 위계 질서가 나타난다.


인간의 최근 조상은 털 달린 원숭이었으리라. 직계 조상은 멸종한지 오래이니 대신 인간과 99.6% 유전자가 일치한다는 침팬지와 친구 보노보가 등장한다. 18세기 서양인들은 유인원을 껄끄러워했다. 마치 요새 우리가 사람과 닮은 로봇을 볼 때 불편한 계곡(uncanny valley)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이 시대 사람들은 침팬지의 검은 얼굴에서 불편한 계곡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인간이 보기에 유인원들은 잔인하고 음탕했다. 침팬지는 암수를 가리지 않고 우두머리 수컷에게 엉덩이를 들이댄다. 보노보는 먹고 자는 일 외에 섹스뿐이다. 타락한 유인원을 보면 신을 버리고 싶어진다고 고백한 성직자도 있었다.인간의 감상과 무관하게, 유인원은 자기네 도덕에 꽤 만족했을 것이다. 이들은 웬만해서는 서로를 죽이지 않으며, 제 새끼를 정성스럽게 기른다.


샌디에고 동물원의 보노보. (https://pixabay.com/, NauticalVoyager)


책 후반으로 갈수록 인간의 조상은 인간과 비슷해진다. 책에는 원숭이들의 학습 능력이 나온다. 새끼 원숭이일수록 새로운 지식을 빨리 받아들인다. 암컷 원숭이는 나이가 들어도 어느정도 배울 수 있지만, 나이든 수컷 원숭이는 좀처럼 무언가를 배우지 못한다. 사람도 비슷하다(성별은 논외로 치자). 나이가 들수록 정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생물학적 학습 능력이 줄어드는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의지의 문제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스스로의 기준도 견고해진다. 자신이 그은 선 밖의 이야기는 잘 듣지 않게 된다.


책이 인간의 조상을 찾던 이유는 인간이 이 우주에 고아로 태어났다는 오만한 생각을 버리게끔 만들기 위해서다. 인간과 나머지 동물을 가르는 질적인 차이는 없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조상에게서 말미암았다. 우리가 동물에서 나왔음을 직시할 때 인간 스스로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책을 읽으며 인간의 오만 뿐 아니라 나의 오만함도 깨달았다. 29년 전에 쓰인 생물학 책인데도 몰랐던 내용이 많았다. 그 분야를 거슬러 연구하지 않은 이상 당연한 일이다. 깨닫고 보니 나는 과학책에 관해 괴상한 준거틀을 갖고 있었다. 비전공자가 쓰는 책을 믿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교수가 쓴 책은 자기 연구는 뒷전이고 대중적인 명성만 바라며 썼을 것 같아 손이 가지 않았다. 최신 과학을 다룬 책은 개념이 완전히 정립되었을지 의심스러웠고, 오래된 과학 책은 과학적 사실이 바뀌었을 수 있으니 읽지 않았다. 어떤 책도 넘어올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지난 달에 APCTP 과학 커뮤니케이션 스쿨을 갔다 오고, 이번에 과학 책방 갈다에서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를 읽으며 부끄러운 선입견도 많이 깨졌다. 책의 내용에 의심이 가면 저자를 비난할 게 아니라 사실관계를 따져야 한다. 내 관점을 갖고 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지식을 익힌 다음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읽을 책은 많이 있고, 생각을 정리할 공간도 충분하다. 시간이 있을 때 익히고 생각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야겠다.


하지만 왜 '잊힌 조상의 그림자'나 '잊어버린 조상의 그림자'가 아닐까? '잊혀진'은 틀린 표현인데 (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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