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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Feb 25. 2020

불교와 진화론은 마주볼 수 있을까?

<붓다와 다윈이 만난다면> 서평

<붓다와 다윈이 만난다면>은 각 분야의 전문가가 각자의 관점에서 진화론과 불교의 관계를 논한 글이다. 종교 없는 한국인에게 불교란 잘 모르지만 낯설지도 않은, 뒷산에 있는 절 같은 존재다. <붓다와 다윈이 만난다면>을 통해 현대 과학과 맥락을 함께하는 불교 철학을 기대했다. 진화론에 대해서는 생물학 전공자로서 기초 지식이 있으니, 이미 알고 있는 개념을 기반으로 이제껏 알지 못했던 세계에 입문하고자 책을 읽었다.


<붓다와 다윈이 만난다면>은 학술대회 '다윈과 불교의 만남 - 진화론과 연기론의 학술적 조명'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표지 출처 알라딘


기대와는 달리, 이 책은 무종교 생물학도가 불교를 배울 책으로 삼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불교와 생물학 두 분야에 정통한 저자는 우희종 뿐이었다. 책 끝에 불교 용어 설명이 있었지만, 한 문장으로 압축한 정의만으로는 낯선 개념을 이해하기 충분하지 않았다. 불교보다는 진화론을 더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진화론이 궁금한 불자에게 좋은 소개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었으나 여전히 불교와 진화론의 연결은 어색하게만 보인다. 사회생물학자 최재천이 말했듯, 과학에 형이상학을 섞는다고 해서 새로운 과학적 사실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몇 천 년을 이어온 종교 사상에 진화론을 덧붙인다고 해서 사상이 갑작스럽게 변할 리도 없다. 최재천은 진화론과 불교의 '통섭'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통섭이란 두 학문이 만나 전혀 다른 개념이 탄생하는 현상이다. 이 책에서 불교와 진화론의 '통섭'을 찾기는 어려웠다. 불교철학자 안성두는 불교와 진화 개념에 성실하게 접근했으나, 진화론과 불교 철학에 등장하는 개념을 유비하는 단계에서 그쳤다.


불교와 과학 사이에는 갈등도, 통하는 맥락도 적다. 이따금 불교는 서양 사상가들에게 '과학적인 종교'로 조명받지만, 이들이 가져오는 '불교'란 맥락을 제거하고 필요한 부분만 따온 파편이다. 재미있지도 않고 반드시 알아야 할 이유도 느껴지지 않는다. 우희종은 진화론과 불교를 알아야 할 이유로 "과학이 과학자만의 지적 유희로 그치면 안 되고, 종교인은 바람직한 종교적 시각을 지니기 위해 초심을 유지한 채 다양한 해석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훌륭한 지적이지만 이것이 '하필 서로를 알아야 할'이유는 되지 못한다.


저자들의 노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불교 간의 소통을 시도한 다른 책을 살펴보는 편도 좋겠다. 우희종은 일찍이 <생명과학과 선>을 출판하며 과학자이자 불자로서 세상을 보는 생각을 풀어 쓴 바 있다. 홍성욱은 불교와 진화론을 말하며 달라이 라마의 <한 원자 속의 우주>를 인용한다. 티벳 불교의 정신적 스승인 달라이 라마는 첨단 과학을 살피면서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라"고 말한다. 


표지만 보아서는 읽지 않았을 것 같지만.. 계기가 생겼으니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고 싶다. 표지 출처 알라딘


학계 바깥에서도 과학과 불교를 새롭게 섞어내려는 시도가 있었다. SF소설가 김보영은 <저 이승의 선지자>에서 과학적 세계관 위에서 불멸하는 존재의 윤회를 그렸다. 과학이 점령한 21세기에 연기론이 세상을 어떻게 말하는지 궁금하다면 <저 이승의 선지자>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저 이승의 선지자> 표지 출처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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