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모과 <밤의 얼굴들> 감상
수록작 <탱크맨>의 주인공은 정신병원 독실에 갇혀 있습니다. 막힌 벽에서는 매일 똑같은 영상이 나옵니다. 주인공은 누구고, 어쩌다 갇혔을까요. 주인공과 함께 좁은 방을 맴돌던 독자는 세 구절만에 상황을 이해합니다. 단 세 구절만으로 한국인 독자라면 누구든 납득할 디스토피아가 펼쳐집니다.
황모과 작가의 <밤의 얼굴들> 속 얼굴은 한국인의 얼굴입니다. 이 책은 한국 독자야말로 제대로 공감할 SF소설입니다. 머지않은 미래, 내지는 여기에는 없는 기술이 구현된 평행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같은 가상현실 기술이 있어도 세상은 그대로입니다. 한 사람이 짊어지기에 너무나 무거웠던 삶은 다음 세대까지 무너져 내리고, 사람들의 아픔은 역사의 앙금으로 남아 벗겨지기만을 기다립니다.
기억해야 할 사람들, 풀어헤쳐야 할 과거의 이야기가 프로파간다로 읽히지 않는 이유를 마지막 <작가의 말>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수록작에는 우리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있었고, 작가는 아픔에 공감하며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옛 SF 소설에서 사람은 미래 과학을 소개하는 소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외계인 유적을 탐사하든, 궤도 엘리베이터를 만들든, 하다못해 가정부 로봇이 인간이 되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영국인이든 인도인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런데도 주인공은 가장 보편적인 인간인 '백인 남성'이 맡아 건강한 가치관으로 이야기를 이끌었지요. 다행히 SF 소설은 발전했습니다. 구체적인 한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가 늘어나다 오늘날 <밤의 얼굴들>에 이르렀습니다.
SF소설이 미래가 아니라 앙금이 풀리지 않은 과거를 향할 때, 이야기 속에는 기술과 마주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밤의 얼굴들>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기술이 나오든 우리는 가족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타지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 친해지며,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어보려 애쓸 겁니다. 다만 어떤 기술은 절망한 이에게 삶을 되찾아줄지도 모릅니다. 이 역시도 평생을 바쳐 기술을 만든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밤의 얼굴들>은 밤이 지나길 기다리는, 희망을 놓지 않는 이의 얼굴입니다. 끈기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부축하고, 부축 없이도 혼자 일어나려는 이야기입니다. SF란 상상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이니, 함께 하는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손잡을 수 있습니다. <밤의 얼굴들>이 SF소설로서가 아니라 과거를 기억하는 이야기로 많이 읽히기를, 잊힌 사람들이 되살아날 기술이 아직 없는 이 세계에서 이 책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2261461
책이 무광 양장이라 참 예쁜데, 양장임에도 가름끈이 없어 읽은 부분을 표시하기가 어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