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는 글
글을 한참 쓰던 시절에 그런 걱정을 했다. 세상엔 자기 이야기를 떠벌리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다. 모두가 글을 쓰고 인터넷에 올리는 시대, 내 글을 사람들이 봐주기는 할까? 무의미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은 기우였다. 글을 안 쓰게 되어서야 깨닫는다. 세상에 글 쓰고 싶은 사람은 많아도 실제로 글을 쓰는 사람은 적다. 남에게 보여주는 사람은 더 적다. 읽는 ‘남’을 고려해서 쓰는 사람은 한 줌도 안 된다(이 글도 그 단계까지는 안 갔다). 그러므로 독자가 재미있어할 글을 꾸준히 쓰다 보면 ‘글 한 편을 완성하는 행위’가 무의미한 단계를 넘어갈지도 모른다.
한참 글을 안 쓰다가 또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오늘 창의재단에서 하는 과학 저술가 면접을 보고 왔기 때문이다. 서류 심사 때 몇 달 전 썼던 과학 글을 고쳐서 제출했는데, 독자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글을 읽히게 하려면 도입부를 흥미롭게 바꿔야 한다고 했다. 알고 있던 이야기이기는 했다. 작년 초에 참가했던 과학 커뮤니케이션 스쿨 수업에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들었기 때문이다. 조언은 뜻과는 반대로 내 삶을 바꾸었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과학 글을 도저히 쓸 자신이 없던 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되는 경우의 수를 버렸다. 대신 과학 연구 제안서를 읽는 지금의 직장에 들어왔다.
이후 나의 글쓰기는 양도 질도 안일해졌다. 일의 특성상 글을 아예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과학자와 인터뷰를 하고 글로 옮겼다. 논문을 덜 어렵게 풀어 설명했다. 하지만 그런 글은 한정된 독자에게 억지로 읽히거나, 독자가 한 명도 없더라도 월급은 받을 수 있는 수준에 그쳤다. 안 그래도 어려운 ‘독자를 고려한 글쓰기’는 포기하다시피 했다. 거기에 회사의 이름을 걸지 않은 ‘나의 글’은 거의 쓰지 않게 되었다.
솔직히, 이제 와서 제대로 된 과학 글을 쓸 자신이 없다. 한동안은 집에서 게임만 했고, 요새는 퇴근 후 운동에 빠져 글을 쓰지도, 읽지도 않았다. 너무나 우울해 글이라도 써야 자신의 쓸모를 느꼈던 대학원생 시절보다 간절하지 않은 것도 있다. (브런치의 과학 글 대부분은 연구실 생활이 너무 힘들어 쓴 결과였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써야만 한다. 매해 같은 일을 반복하는 직장 일을 벗어나 스스로에게 만족하면서도 사회에 기여할 길은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다.
과학 저술가 과정도 그 시절 의욕을 대신할 동기를 찾기 위해 신청했다. 누군가 내어준 글쓰기 숙제가 지렛대가 되어 다시 글이 쓰이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다른 누구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즐겁지 않으면 욕심만 부리다 스스로를 괴롭힌 결과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