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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Jul 31. 2021

문장이 만드는 사랑의 경지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서평

최대한 스포일러 없이 작품을 소개하겠지만, 그래도 책 표지 뒷장에 쓰인 정도의 줄거리는 들어갑니다. 이조차 없이 책을 보실 분들은 SNS에 소개한 타래를 읽고 결정하세요(https://twitter.com/observer_kadac/status/1418865282886475776?s=20).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문장과 챕터어느 경지까지 나아갈 지 실험한 작품입니다. 실험이 어찌나 성공했냐면, 두 여자가 사랑에 빠져 서로를 구하는 이야기 따위로 눈 높은 SF독자들을 다 홀렸어요. 정량적(?)인 근거로 2020년 휴고-로커스-네뷸러상을 석권했습니다.


표지 출처 알라딘 (aladin.co.kr)


SF 문학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시각화하는 묘사가 많습니다. <듄>이 대표적입니다. 1부만 읽어도 머릿속에 아라키스 사막이 그려지니까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컴퓨터 그래픽이 너무 발달해서,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도 얼마든지 화면에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듄>도 올해 10월에 영화로 나오고요. 그래서 어떤 작가들은 다른 전략을 택했습니다. 시각화가 안 도는 묘사를 문장으로 조립하는 것입니다. 독자는 문장을 읽고 장면을 상상하는 대신, 생각도 못했던 낱말 조합이 맞물려 생기는 효과에 감탄합니다. 이런 문장으로 가득 찬 소설은 문장 자체를 즐겨야 하니 다른 매체로 옮길 수도 없습니다. <당신들은…>은 영화화되지 못할 거예요. 어쩌면 문학이 남을 마지막 영역이 이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듄> 책(aladin.co.kr)에서 상상만 하던 장면을 영화(www.eyesmag.com/)로 보는 일이 일도 아니게 되었죠.


판타지-SF는 ‘상상할 수 없는 묘사’를 용납하는 몇 안 되는 장르입니다. 문장에서 생경함을 강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밑바닥에서 전혀 다른 공간을 창조하기보다는 독자에게 배경 지식이 있는 세계관이 더 낫습니다. 화성에 나타난 화성인보다 동네 GS25에 나타난 화성인에 훨씬 깜짝 놀라듯이요. 그래서 작가는 ‘시공간 이동 가능한, 우리 세계도 속한 다중 우주’를 배경으로 정했습니다. 주인공은 독자가 아는 시대에 가서 이름을 들어본 인물들을 만납니다. 다중 우주 세계관답게 전혀 다른 존재로 나오고요.


작가들은 왜 이런 복잡한 세계관을 고르고, 어려운 문장을 써가면서까지 생경한 묘사에 애를 썼을까요? 두 주인공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인공 둘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육신도, 정신력도 현실 세계 독자들과 다릅니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인물들은 어떻게 서로를 느끼고 사랑할까요. 문장도, 챕터도, 배경도, 서사도 이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우리는 멋진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 사랑을 실제로 경험하기를 꿈꿉니다. 하지만 소설이 가능한 모든 이야기를 만드는 수단이라면, 이입조차 할 수 없는 사랑도 그릴 수 있겠지요. 문장을 조립해 시각화할 수 없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 처럼요. 하지만 사랑은 인류 보편의 감정입니다. 독자는 둘의 사랑 자체에는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과물이 특이합니다.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과 방법이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을 읽으면 구구절절한 문장에 감동하게 됩니다. 챕터마다 들어있는 장면과 편지 사이의 갭이 책을 읽는 묘미입니다.


저는 그 어떤 매체보다 글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문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즐기면서 책을 따라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취향이지는 않겠지요. 복잡한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 장대하면서도 디테일을 살린 세계관을 감상하기 위해 SF를 읽는 사람, 무릇 이야기를 읽고 나면 곰곰이 씹을만한 철학적 질문이 하나는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당신들은…>은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글을 읽으셨다면 이 책이 궁금하겠지요. 그렇다면 읽어보세요. 수많은 SF 작가들과 권위 있는 심사위원들이 다 함께 이 책을 선정했습니다. SF독자란 제가 앞서 언급한 취향들 다 갖고 있으면서도, 문장이 갖는 힘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원서 표지인데 한국어판이 훨씬 강렬하네요(www.amazon.com)




읽으면서 와닿았던 문장을 모았습니다. 문장이 서사보다 중요한 책이니 인용이야말로 중대한 스포일러입니다. 조심히 보세요.



"먹는다는 행위는 끔찍하지 않아? 관념 차원에서 보면 말이야. 자라면서 아름답다고 배운 것들이 대부분 멋진 기계의 심장부에 도사리고 있다면, 그렇다면 타액이 분비되는 치육 부위에 돌출된 뼈들을 사용하여 흙에서 자라는 것들을 짓이겨서 입부터 심장 아래의 산 주머니까지 이어진 축축한 관을 내려가기 쉽게 곤죽으로 만드는 행위에 매력을 느끼기가 힘들겠지" - p 66-67



섬 하나를 구하는 것은 여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그녀는 한 여자의 힘으로 가능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 p72-73


"나는 너의 것이야. 너의 기척을 찾아 세상을 주시하는 동안, 동물의 내장을 보고 점을 치는 점쟁이처럼 상관도 없는 것에서 너와 연관된 점을 찾는 동안, 너의 것이야. 편지를 부칠 방법과 이유와 기회를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 너의 것이고, 네가 적은 말들을 순서에 따라, 소리에 따라, 냄새에 따라, 맛에 따라 음미하는 동안, 그 기억 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너무 바래지 않도록 보살피는 동안, 나는 너의 것이야." - p118


"지난번 편지에 나와 함께 살면 어떨지 적었지. 친구나 이웃끼리 함께 사는 식으로. 그 생각을 어찌나 간절히 했던지, 내가 사는 이 골짜기를 통째로 삼켜도 허기가 가시지 않을 것 같아. 그 대신 나는 내가 느끼는 갈망을 실로 자아서 너라는 바늘의 눈에 끼우고, 내 살갗 아래 어딘가 꿰매어 감춰 뒀어. 너에게 쓰는 다음번 답장을 그 실로 한 땀씩 수놓으려고." - p 146


"난 말하고 싶었어. 네가 마실 차를 내가 끓여 주고 싶어." - p173


때로는 포옹을 목 조르기로 오해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를 끌어안는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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