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이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달 반. 떠난다는 것 이외에는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6개월간의 제한된 일상 때문인지 그저 떠난다는 자유로움과 설렘으로 들떴다가 때때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한 걱정이 마구 밀려오기도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잘하고 있는 건가?"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원하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지 뭐.’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실감이 나질 않는다. 여전히 일상은 계속되고 있고 아직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 조차 예약하지 않았다. 하나, 둘 씩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우리 앞에 길고 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첫 번째 이별:
의외로 제일 빨리 떠난 건 우리 가족의 첫 차, CRV. 작년 이맘때쯤 아이가 학교를 시작하면서 남편과 번갈아 가며 아이를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야 했기에 차가 한 대 더 필요했다. 그래서 작년에 더해진 새 차는 지난 6개월 동안 산과 바다로 우리를 데리고 다니느라 바빴지만 기존의 차 한 대는 거의 탈 일이 없었다. 가끔 생각날 때 배터리가 나가지 않았는지 살펴주면 그만이었다. 재택근무가 길어지면서 차를 한 대 팔아야 하나 고민 중에 있던 우리는 떠나기로 마음을 먹자마자 제일 먼저 CRV를 팔기로 했다. 쉬프트(Shift)라는 곳을 이용해 차와 관련한 정보를 올리자 다음날 관련 직원 두 명이 와서 차로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고 구석구석 살펴보더니 돈을 주고 바로 차를 가지고 갔다. 참고로 쉬프트 이외에 카멕스(Carmax), 카바나(Carvana)등의 차를 팔 수 있는 사이트가 있고 미리 견적을 받아 볼 수 있다. 우리도 여러 곳에서 견적을 받아보고 비교해서 쉬프트를 선택했다. 어쩌면 차가 오늘 떠날 수도 있다는 남편의 말에 평소와 달리 오늘은 CRV를 타고 아인이를 데리러 갔다. 마지막으로 깨끗하게 세차도 시켜주었다.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를 왔다 갔다 하며 연애시절의 우리를 많이도 실어 날랐던 차, 우리의 연애 이야기와 결혼 이야기뿐 아니라 작디작은 신생아 아인이를 집으로 무사히 데리고 온 우리 가족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지난 몇 년의 역사가 담긴 차. 테슬라가 생기면서 이용이 줄어들고 잘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떠나는 마지막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했다. 테슬라를 워낙 좋아하는 아인이는 CRV가 가는 건 신경도 안 쓸 줄 알았는데 아인이도 우리와 함께 아쉬워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요즘도 지나가다 CRV가 보이면 우리 차가 생각나는지 반갑게 인사한다. 나도 덩달아 한 번씩 우리 차가 잘 있는지 궁금해지곤 한다. 좋은 주인을 만나 신나게 달리고 있길 바랄게. 고마웠던 우리의 첫 번째 차. CRV. 안녕.
아직도 이별 중:
다음은 CRV와는 사정이 좀 다른 테슬라이다. 테슬라는 남편이 매일 40-50분 운전을 하고 출퇴근을 해야 해서 자율주행의 기능을 활용하기 위해 선택한 차이기도 했지만 아인이가 특별히 좋아해서 고민 없이 리스 한 차이다. 3년 리스 계약으로 1년을 탔고 차를 가져가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에게 리스를 넘겨야 했다. 차를 가져가는 옵션을 먼저 생각해보았는데 일단 차를 6개월 동안 보관해야 하는 것, 사용하지 않는 동안 매달 돈을 내는 것, 나중에 차를 원하는 곳으로 가져가는 비용 등 일단 돈이 많이 들었다. 보관하는 것부터 나중에 여기로 다시 돌아와서 차를 가져가는 것까지 일이 복잡했다. 결론적으로 테슬라도 처분하고 가기로 했다. 스왑어리스(Swapalease)에 문의를 하여 차를 리스팅을 하자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왔고 그중 한 명과 이야기가 되어 리스 이전 프로세스를 시작하였다. 테슬라에서 리스를 이어받을 사람의 크레딧 체크를 하고 서류 작업을 하는데 보통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한다. 프로세스가 끝나면 차를 넘기면 되는 것이었다. 너무 차가 빨리 가버리면 차 없이 마지막 몇 주를 어떻게 지내나 고민이었는데 결국은 프로세스가 늘어져 남편은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았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지막 날까지 우리 차를 이용할 수 있었다. 지인의 집에 잠시 차를 맡겨두었고 다행히 모두 해결이 되어 며칠 후면 차를 가져간다고 한다. 떠나는 날까지 짐 정리, 집 정리, 아인이의 마지막 등하교로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슬픈 감정을 외면하려고 나도 모르게 애썼던 것 같다. 돌아 올 수도 있다는 여지를 두고 떠나는 바람에 테슬라도 맡겨 놓고 다시 만날 것처럼 그렇게 떠나왔다. 많은 사람들과도 제대로 이별하지 못했다. 어디서든 언젠가는 다시 만날 거니까.
잠시만 안녕:
자. 차는 해결이 되었고 이제 이 많은 짐을 대체 어디에 두고 가느냐가 문제였다. 미국에서 주를 넘나들며 이사를 몇 번씩 했던 주변의 친구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엘에이에 주로 본사를 두고 있다는 한국 업체에 전화해서 견적을 받아보았다. 각종 웹사이트의 스토리지 가격을 비교해 본 후 우리는 큰 가구는 웬만하면 다 팔고 최소한의 짐을 스토리지에 넣어두기로 했다. 앞으로 언제 어디에 정착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짐을 이고 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의 입장은 아무리 다 처분한다고 해도 우리 셋의 기본적인 짐이 많을 텐데 스토리지에 다 들어갈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고 남편은 가구를 다 팔고 나면 가져갈 짐이 별로 없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일단 해보자. 안되면 큰 스토리지를 빌리는 방법도 있다. UHaul의 유박스라는 서비스(UBox)를 이용했는데 95”x56” x83.5” (2.4m 1.4m x 2.1m) 사이즈의 컨테이너를 집 앞에 가져다주고 우리가 짐을 다 넣으면 가져간다. 아직 우리의 다음 목적지가 결정되지 않은 이 시점에서 스토리지에 우리의 짐을 그대로 보관하다가 나중에 원하는 곳으로 가져다주는 유박스의 옵션은 우리의 상황에 딱 맞았다. 떠나기 3일 전 예약해 둔 유박스가 도착했다. 아인이는 집 앞에 커다란 박스가 생기니 신나는 모양이다. 몇 번이나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며 놀았다. 갑자기 아인이의 임시 놀이터가 생겼고 우리 짐들의 임시 집이기도 하다. 3일 동안 집 앞에 놓인 컨테이너에 하나에 부지런히 짐들을 꽉꽉 채워 넣었다. 대부분의 가구를 팔았고 필요 없는 물건들은 필요한 사람에게 주기도 하고 많이 버리고 최대한 줄였다. 컨테이너 한 개는 원룸 정도의 짐, 두 개는 방하나, 세 개는 방 두 개로 추천해주었는데 6년간 방 두 개짜리 집에서 살림살이를 늘리며 살았던 우리가 얼마나 짐을 줄였는지 알 수 있다. 한국으로 가져갈 짐들 빼고 미국에 남을 짐들이 가득 실린 컨테이너 하나를 트럭이 싣고 유유히 떠났다. 무거웠던 어깨와 두 손이 다소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잠시만 안녕!
+ 우리와 함께 한국으로 날아갈 무게 꽉꽉 채운 6개의 캐리어가 우릴 보고 웃고 있다.
++ 차와 관련한 모든 처리와 유박스를 예약하고 조율하는 일 모두 남편이 하고 나는 글만 쓴 거 같아서 크레딧을 밝힌다. :)
+++ 든든한 남편, 무거운 짐 옮기고 테트리스 하느라 수고 너무 많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