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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파이 Feb 16. 2024

영국에서 건너온 명이나물

명이나물 하나에 추억 그리고 사랑

외가는 가난했다. 외할머니는 7남매 중 아들들, 그중 공부 잘하는 놈들만 쏙쏙 골라 대학을 보내기로 했다. 나머지들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무조건 돈 벌어야 한다고 했다. 고등학교 보내주는 게 어디냐고 했단다. 그 시절 많은 집들이 그랬다. 집안을 일으킬 아들들, 그중에서도 공부 잘하는 한두 놈을 밀어주는 게 당연한 거였다. 공부 잘하는 개천용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는 세상이었다. 딸들은 시집가면 그만이라고, 그러니 가족을 보살피는데 그네들의 노동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오죽하면 <아들과 딸>이라는 주말드라마 방영 시간에 온 가족이 두런두런 모여 앉아, 귀남이 후남이를 보며 눈물 짜내고 옛 시절에 공감하며 봤을까.


큰 이모는 남매들 중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었지만, 나머지에 속했기에 가고 싶었던 교대를 들어갈 수는 없었다. 엉엉 울며 가장 아끼는 동생이었던 엄마에게, 너는 꼭 서울로 가서 뜻을 펼치라고 했다. 중학교 졸업반이었던 엄마는 그 길로 큰 이모의 도움을 받아 어깨는 무겁지만 발걸음은 누구보다도 가벼운 상경을 했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엄마는, 7남매 지옥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며 너무나 행복했다고 했다. 고등학생의 반짝반짝 빛나는 엄마, 사진 속 활짝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에는 짙은 자유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때 만난 영이이모와 숙이이모가 엄마의 평생 친구들이 되었다. 그들은 서울의 온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며 고등학생다운 천진함과 순진무구함으로 그들만의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편의상 엄마의 언니인 친이모는 큰 이모, 엄마 친구들은 영이이모, 숙이이모 혹은 이모들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 시절 엄마의 숨통을 틔워준 건 큰 이모의 희생덕이었고, 둘째 딸이던 엄마는 집안 사정을 알았지만 3년간 이 악물고 모르는 척 이기적으로 굴었던 부분도 있었다고 했다. 나중에서야 그 이야기를 하며 평생을 언니에게 빚 갚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했단다. 큰 이모는 엄마 몫의 집안일까지 다 해야 하는 걸 감수하면서도 너는 이렇게 살지 말라며 자식 같은 마음으로 엄마를 상경시켜 주었던 거다.

 



결국 엄마도 외할머니의 독촉에 따라 고등학교 3년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내려가야 해서 대학 진학은 실패했다. 그래도 그 시절 엄마 친구들과의 빛나는 추억이 있어서 괜찮다고 했다. 엄마는 친정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큰 이모가 결혼해서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엄마를 계속 마음에 품고 있었던 외삼촌의 친구(아빠)와 이른 결혼을 했다. 셋 중 가장 공부를 잘했던 영이이모는 대학의 영문학과에 진학을 하고 학원이며 과외로 밥벌이를 하시다가, 선교사인 남편을 만나 그와 함께 영국으로 가셨다. 거기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열심히 공부해서 간호사가 되셨다. 나중에는 준의사 자격증을 따시고는 언제부턴가 쭈욱 병원에서 일하신다고 했다. 숙이이모도 엄마와 비슷한 이유로 이른 결혼을 선택했지만, 결혼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녀는 남편과 헤어지고 타고난 생활력으로 동대문에서 옷장사를 하다가, 그녀의 언니들과 반찬가게를 열었다가 나중에는 식당으로 정착했다. 몇 번의 업종 바뀜은 있었지만 특유의 쾌활함으로 스스로의 삶을 당당하게 개척해 나갔다.


엄마와 이모들은 영이이모가 영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1박 2일이나 2박 3일간 국내여행을 함께 떠난다. 우리가 어릴 때는 우리도 데리고 가서 영이이모와 숙이이모의 자녀들과도 함께 만나 놀곤 했다. 영이이모 아이들이 좀 어리긴 했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다들 나이대가 비슷했어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왔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엄마와 함께, 이모들에 관해 혹은 이모들의 자녀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꽤나 재미있었다. 어린 맘에도 엄마의 추억을 함께 공유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의 우정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나도 저런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늘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로 밥값을 내겠다며 싸우는 건 예사였고 멀리서 온 친구에게 기어이 왕복 택시비를 옷이나 가방에 꽂아두거나 택시 안으로 밀어 넣기 일쑤였다. 오며 가며 절대 빈손으로 보내지 않는 게 그들의 암묵적인 룰이라도 되는 양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항상 커다란 짐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만나는 그녀들이었다. 헤어지는 와중에도 서로의 자식들에게 기어이 용돈 한 푼씩 쥐어주며, 우리 궁상맞게 다시는 이러지 말자고 약속을 했다. 그러고는 다시 만나면 셋 다 똑같이 붕어의 기억력으로 지난번의 다짐은 잊고 또다시 피곤한 과정을 되풀이하곤 했다. 지켜보는 우리들은 그저 재미있었고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끈끈한 정이 느껴져서 매번 따스한 핫팩을 하나씩 마음에 품고 집으로 향했다.   


우리가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엄마나 숙이이모가 영국으로 갈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영이이모는 낼 수 있는 한 최대로 휴가를 내서 엄마와 숙이이모를 차로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신다고 했다. 세 분이 제일 좋아하는 곳은 벼룩시장이어서 엄마가 영국에 다녀올 때면 옛 영국의 성에서 나올법한 골동품들이 요술상자 같은 엄마의 커다란 가방에서 주섬주섬 끝도 없이 나오곤 했다.




몇 년 전부터 영이이모는 영국에서 한국으로 오시는 날이면 명이나물 장아찌를 한 트럭씩 가지고 오시기 시작하셨다. 영국 사람들은 명이나물을 먹지 않는데, 명이나물이 사방천지 자라는 스팟을 발견하셨다고. 그곳은 명이나물 노다지였던 것이다. 거기서 4-5월이 되면 명이나물을 잔뜩 뜯어오셔서 장아찌를 만드신다고 했다. 영이이모가 가지고 오시는 명이나물의 규모는 어마어마해서 영이이모의 가족분들, 그리고 엄마와 숙이이모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인 우리들까지도 1년은 족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우리는 공짜로 명이나물을 받기가 미안해 영이이모가 한국으로 들어오신단 말이 들리면 각종 영양제며 영이이모에게 필요할 법한 것들을 그 옛날의 이모들이 했던 것처럼 바리바리 싸놓게 된다.   


고기에 명이나물 조합은 최고


영이이모표 명이나물은 우리 집 밥상에 빠져서는 안 될 필수요소가 되었다. 초보주부 시절엔 뭐 이런 걸 하면서 난감해했지만 명이나물은 어디에도 잘 어울리는 요물이라는 걸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계란밥에 명이나물 잘게 잘라서 참기름을 넣어 비벼먹으면 영양만점의 맛도 훌륭한 한 끼, 아침식사 뚝딱이다. 그것뿐인가. 고기라도 굽는 날에는 명이나물 없는 식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입맛 까다로운 남편도 꼭 한 번씩 찾는 우리 집 명물이며, 김치를 잘 안 먹는 아들에게는 김치의 대체제이기도 하다. 몇 번 명이나물이 떨어져서 사 먹기도 했는데, 영이이모의 손맛이 담긴 그 깊은 맛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보내주는 명이나물은 그야말로 정성이고 사랑이다.


사실은 성인이 되고부터는 엄마와 이모들에 대한 이야기를 점점 덜 듣는다. 친정에서 떨어져 살게 되면서 엄마의 관계들은 자연스레 추억 속에 점점 묻혀간다. 예전에는 며칠 걸러 한 번씩 듣던 이야기와 소식들을 이제는 월단위로, 연단위로 들으며 가끔 쓸쓸한 마음이 든다.


이모들의 안부를 덜 묻는 어른이 된 나는, 명이나물을 보며 한 번씩 이모들과 어릴 적 추억들을 떠올린다. 명이나물은 엄마와 이모들을, 나와 이모들을 이어주고 떠올리게 만드는 매개체이다. 영국에 다녀오신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엄마는, 명이나물 뜯으러 영국에 가야겠다며 매년 봄이 되면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언젠가 한 번은 나도 엄마 손잡고 영이이모 보러 영국 가야겠네 생각하며, 오늘도 냉장고에 고이 넣어둔 명이나물을 꺼내어본다. 그녀들의 우정의 깊이만큼 명이나물의 맛도 깊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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