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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Jun 24. 2017

불이 꺼진 놀이동산이라도 놀이동산이니까

온 세상이 비라면 - 이치카와 다쿠지

불이 꺼진 놀이동산이라도 놀이동산이니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평소 일본 문학을 즐겨 읽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학창 시절에 읽었던 다양한 문학 작품 중에 맘에 들었던 것 중에 일본 문학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물론 다른 문화권의 문학 작품 역시 좋아합니다만, 어쩐지 일본 문학에는 친근한 느낌이 있습니다.


  어떤 작가를 가장 좋아하는지 물어보실 수도 있겠습니다. 다양한 작가를 읽었던 것 같습니다. 유명한 작가부터 지금은 작품 제목만 기억나는 작가까지요. 그래도 혹여나 이름을 물어보신다면,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츠지 히토나리(辻仁成)’, ‘에쿠니 가오리(江國香織)’ 등이 있겠습니다. 일본 문학을 읽어보셨다면 익히 들어보신 혹은 읽어보신 작가들일 수도 있겠네요. 갑자기 일본 문학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당연히 오늘 소개할 책이 일본 작가의 책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작가는 아닙니다. 상단의 작가들만큼 유명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언제나 즐겁게 읽고, 신간을 내주기를 기다리는 작가 ‘이치카와 다쿠지(市川拓司)’입니다.



  제 생각이 틀린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치카와 다쿠지’는 그렇게 국내에서 유명한 작가는 아닙니다. 왜일까요? 조심스럽게 생각해보건대 최근 국내에 발간된 신간이 없다는 점 때문은 아닐까요? 마지막 신간이 2009년이었으니까요. ‘이치카와 다쿠지’라는 이름을 아는 독자는 많지 않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많은 분들이 그의 작품을 알고는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유명하고 여전히 높은 평점을 기록하고 있는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いま、会いにゆきます)>의 원작자이거든요.


  ‘아! 그 영화!’라는 생각이 번뜩 드시는 분들이 있으실까요? 따뜻하고, 미소가 지어지는, 그리고 동시에 마음이 아리는 작품이지요. ‘이치카와 다쿠지’는 많은 책을 쓴 ‘다작’ 작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곧잘 영화화되곤 했지요. 다른 작품을 예를 든다면 조금 더 반갑게 느끼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Heavenly Forest)>는 ‘이치카와 다쿠지’의 『연애사진』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그때는 그에게 안부 전해줘(Say Hello For Me)> 역시 ‘이치카와 다쿠지’의 『그때는 그에게 안부 전해줘』 원작이지요.


  어떤가요? 이미 읽어본 분도 계실 것이고, 혹은 영화를 재미있게 본 터라 원작이 궁금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감히 장담컨대 ‘이치카와 다쿠지’의 작품은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소개해드릴 그의 책은 저 중에는 없습니다. 사실 읽어본 분도 매우 드문 책이라 생각돼요. ‘이치카와 다쿠지’의 단편집 『온 세상이 비라면』입니다. 『온 세상이 비라면』은 세 개의 단편이 묶인 책입니다. 차례대로 <호박(琥珀)속에>, <온 세상이 비라면>, <순환 불안(循環不安)>이 실려 있습니다.


  ‘이치카와 다쿠지’는 그가 내보이는 독특한 설정들로 그의 작품들을 ‘이치카와 월드’에 속한다고도 이야기하죠. 재미있는 별칭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의 최근작들은 이런 이야기에 맞게 정말 독특한 설정들을 가미하여 아기자기한 재미와 감동을 선사합니다. 마치 아주 독특한 놀이동산에서 갖가지 신기한 놀이기구를 타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앞선 그의 유명한 작품들을 생각하고 그쯤 비슷한 것을 기대하시고 『온 세상이 비라면』을 읽는다면 크게 당황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이 비라면』에 실린 작품들은 그의 초기작으로 아주 어두운 색채를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작과의 엄청난 괴리감에 당혹스러울 정도죠. 하지만 분명 이 책 역시 ‘이치카와 월드’에 속해있습니다. 독특하고 오리지널한 그의 설정들.


  여기서 세 단편의 모든 줄거리를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혹시나 읽어보고 싶어 하실 분들을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간략한 설정과 발췌 정도라면 괜찮겠죠? 간질거리는 호기심을 일으킬 정도만 말이지요.



<호박(琥珀)속에>


  먼저 <호박(琥珀)속에>입니다. 열일곱 살의 ‘긴다’는 같은 반의 ‘후카자와’라는 여학생을 좋아합니다. 사실 긴다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남학생은 후카자와를 좋아하지요. 마치 하나의 조형물같이 그녀는 아름답고 청초하니까요. 뭇 남학생들의 밤잠을 설치게 할 만한 여학생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후카자와는 살이 찌기 시작합니다. 그녀 때문에 밤잠 못 이루던 남학생들을 무너져가는 후카자와를 보며 포기하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긴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긴다는 그녀 내면의 아름다움을 좋아했으니까요. 긴다에게는 살이 쪄도 후카자와는 여전히 후카자와였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같이 하교하게 된 긴다와 후카자와. 그날 집 근처 공원에서 둘은 키스를 합니다. 풋풋한 입맞춤이 아닌 조금은 농밀한 키스였지요. 그렇게 둘은 사귀게 됩니다. 그리고 숙맥이었던 긴다를 후카자와는 간단히 자신의 침대로 초대합니다. 그때부터 둘은 서로의 육체를 탐하기 시작하지요. 매일같이 후카자와의 집을 찾아가는 긴다. 유달리 쌀쌀한 집, 이상한 냄새, 천이 덮인 수조. 긴다는 자신이 발을 잘못 들였다는 느낌을 받지만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습니다. 그리고 진실을 마주하게 되지요.


  그녀는 항상 그런 식으로밖에는 사랑을 하지 못했다. 불안에 떨면서 그녀는 항상 찾고 있었다. 떠나지 말고 내 곁에 있어달라고 애원하며 그녀는 그때마다 자신의 몸을 사내들에게 내밀었다. 그들이 자신에게서 원하는 것은 오직 온기를 지닌 황금률뿐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녀는 알아주었을까? 내가 원했던 것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저 높은 하늘의 여신상 같은 게 아니라 그 안쪽에 있는 따스한 무언가였다는 것.
  얘, 후카자와.
  너는 이마를 찡그리는 일 없이 나를 만져주었지. 너는 나를 마지막까지 싫어하지 않았어. 너뿐이야, 그런 식으로 대해준 건. 그러니까 너를 위해 나도 뭔가 해주고 싶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네 곁을 떠나지 않는 것 정도밖에 없었어. 그래서 네가 “이제 됐어,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어”라며 다른 누군가에게로 떠나가는 그날까지 나는 내내 네 곁에 함께 있어줄 생각이었어.
  얘, 후카자와. 우리는 서로 사랑했을까?
  햇볕이 들지 않는 어둡고 눅눅한 장소에서 그 감정은 싹이 트고 아무도 몰래 커나갔어. 그건 몹시 뒤틀리고 목적도 미래도 갖지 못한 생명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있는 힘껏 살았었지? 분명 앞으로도 이 마음은 계속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죽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그날까지, 어둡고 눅눅한 장소지만 그건 끈질기게 살고 또 살아갈 거야.


<온 세상이 비라면>


  ‘도가와’는 왕따입니다. 그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수시로 괴롭힘을 받지요. 한때는 같은 학교에 다니던 누나가 지켜주기도 했었지만, 누나가 졸업한 이후로는 그마저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괴롭힘은 끝나지 않고, 마치 운명처럼 도가와를 따라다니지요. 그래서 도가와는 죽기로 결심합니다.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도가와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지요. 그리고 그날 도가와는 평소와 다른 석연찮은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이지만, 그의 부모님은 여전히 도가와에게 냉담합니다. 오직 누나만이 도가와를 진정으로 신경 쓰지요. 이상한 느낌에 도가와의 누나는 늦은 밤 동생에게 찾아가지만, 이미 불이 꺼진 방문을 두드리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자정에 가까운 시각 도가와의 방은 불이 잠깐 켜지고, 얼마 안 가 다시 불이 꺼집니다. 도가와는 성공했을까요?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가 말했다.
  “도망?”
  그렇게 묻자, 그녀는 날카로운 시선을 내게로 향했다.
  “그래요.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처마 밑으로 도망쳐요. 그런 식으로 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이라고 나는 말했다.
  “온 세상이 비라면?”
  내 말을 듣고 그녀가 피식 웃었다. 뜻밖에 어린 얼굴이어서 나는 그녀가 동생과 같은 나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순환 불안(循環不安)>


  ‘오사무’는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합니다. 그리고 ‘이자와’라는 컨설턴트는 오사무에게 ‘이즈카’라는 여성을 소개해주었죠. 비록 이즈카와는 잘 되지 않았지만, 오사무는 이자와 씨를 아주 좋게 생각합니다. 그녀가 다음으로 소개해준 ‘아이코’ 씨가 매우 맘에 들었기 때문이죠. 사실 아이코 씨와도 그저 그렇게 끝날 뻔하였지만, 우연히 자신이 낸 용기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됩니다. 아이코 씨와 점점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어느 날, 이자와 씨가 오사무에게 찾아옵니다. 난데없이 찾아온 그녀는 오사무에게 이상한 소식을 전합니다.


  오사무는 4년간에 걸친 괴로운 나날들을 떠올리고, 이어서 아이코의 웃는 얼굴을 생각했다.
  이제 잠깐이면 꿈은 이루어진다.
  성공과 사랑, 그 두 가지를 내 손에 넣기 위해 나는 해야 할 일들을 똑똑히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어엿한 한 몫의 사내라면 그것을 해낼 수 있을 터다.
  그렇지?


  어떤가요? 조금은 읽어볼 구미가 당기시나요? 분명 『온 세상이 비라면』은 이치카와 다쿠지의 최근작들과는 대척점에 있습니다. 분위기는 어둡고 칙칙하고, 묘사는 선정적이고 거침없으며, 소재는 충격적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작품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이치카와 월드’에 속한 작품이지요. 조금 색다르게 표현하자면 ‘불이 꺼진 이치카와 월드’가 아닐까요?


  욕망과 절망, 죽음, 그리고 사랑. 이치카와 다쿠지의 다른 작품을 읽고 맘에 드셨다면, 『온 세상이 비라면』 역시 둘러보심을 추천합니다. 언제 읽어도 그의 작품은 잘 읽히고 재미있습니다. 어쩌면 저는 이미 ‘이치카와 월드’가 불이 꺼지건 말건 단골손님이 되어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어서 새로운 책, 새로운 놀이기구를 가지고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두말 않고 티켓을 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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