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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Oct 24. 2017

오선지에 아로새겨진 감정의 변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https://youtu.be/HaRo5yxlN4g

발아래 바스러지는 나뭇잎


  어느덧 푸르던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귓가를 간질이는 계절이 되면, 벌써 가을이 지나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하루 그 과정을 준비하던 나무는 조금도 쉼이 없었건만,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싱싱한 잎과 갑작스레 발아래 바스러지는 나뭇잎 조각이네요.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어찌나 조용하게 모든 것들이 우리네 삶을 스쳐 지나가는지.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우리 곁을 지나갑니다. 어떤 것은 눈에 띄어 내게 의미를 남기고 사라지고, 어떤 것은 얕게 부는 바람처럼 뒤돌면 이미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요. 때로는 내가 아니라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나를 지나치는 것 같기도 해요. 나는 선 채로 가만히 있고, 삶은 내 뒤로 흘러 흘러 흘러가는. 현재에서 거리를 두고 나의 삶을 조망하듯 바라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사랑도, 기쁨도, 사건도, 절망도 모두 선이 되지 못한 점처럼 인생의 도화지에 작은 흔적을 남길 뿐이지요.



오선지에 아로새겨지는 감정의 변주


  그 작은 점들 속에서 우리의 감정은 어찌나 변덕스러운지요.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느끼기도 하고, 한때는 기쁨이었던 것이 이내 슬픔으로 변모하기도 합니다. 곧게 뻗어가는 오선지처럼 삶은 계속해서 지나가고, 순간의 감정들은 작은 음표가 되어 아름다운 하모니로, 때로는 불협화음으로 변주를 이룹니다. 삶이라는 각자의 교향곡은 그렇게 흐르다 생의 끝에서 완성됩니다. 그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삶의 한 마디. 아름답고도 슬프게 흐르던 멜로디. 그해 39살이었던 폴의 삶에 브람스가 흐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고작 질문 하나에 너무 심각하지 않은가? 브람스를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 간단한 질문 아닌가?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간단한 질문입니다. 피자를 좋아하느냐 마느냐 같은 질문과 다를 게 없이 들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삶은 때로 그렇습니다. 짧은 그 한 마디 안에 감정이 요동치기도 합니다. 남자친구가 있는 39살의 폴, 25살의 젊은 시몽의 질문에 그녀의 감정이 변주를 시작합니다.



요트의 작은 떨림, 라디오를 켜는 손등에 비친 정맥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으며 제 인상에 깊이 박힌 것은 폴을 비롯한 주인공들의 선택이나, 소재의 참신함, 줄거리의 흥미로움이 아니었습니다. 소재는 이미 흔한 사랑 이야기이고, 줄거리는 그리 특별하지도 예상하기 어렵지도 않았으니까요. 다만 그럼에도 이 짧은 작품이 저로 하여금 몰입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책에 한 번 더 손길을 가게 했던 건 시시각각 변하며 미묘하게 이어지는 감정선이었습니다.


그의 손가락에서 맥박이 파닥이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는데, 그 눈물을 너무도 친절한 이 청년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아니면 조금쯤 슬픈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키스했다.


  어쩌면 아무 상관 없을 순간순간의 행동과 말들. 그리고 그 순간에 흐르는 감정의 변화. 작은 부분에서조차 이 책은 풍부한 감정이 서로 얽혀 있습니다. 한순간에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아주 일상적이고 작은 변화로 그 모든 행복이 무너지기도 하지요.


당시 이미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지속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마르크의 요트에 타고 있었다. 요트의 돛이 불안한 마음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문득 그녀는 행복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번개 같은 깨달음과 함께 자신의 삶 전체와 세상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뱃전에 몸을 기울이고 빠르게 흘러가는 물에 손가락을 담그려 했던 것이다. 작은 요트가 기울어졌다. 마르크가 그녀에게 특유의 무사태평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즉각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행복감이 물러가고 조롱기가 차올랐다.


  폴이 유달리 예민한 걸까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 역시 폴과 마찬가지죠. 다만 우리가 시시각각 변하는 스스로의 감정을 세밀하게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지금 당장 이 순간 각자의 감정을 묘사해본다면 어떨까요? 기쁨인가요? 슬픔인가요? 아니면 다른 어떤 것? 혹은 아무 감정도 들지 않나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그 감정이 표현하기에 가장 가깝고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의 그보다 작은 감정들도 우리는 분명 느끼지만, 그 크기가 미세하여 혹은 표현할 길이 없어 지나칠 뿐이지요. 지난 상황을 되돌아보아요. 기쁨을 느낀 순간, 정말 오직 순수하게 기쁨만이 느껴졌었나요? 그와 동시에 혹은 그 전후로 다른 감정이 섞여들어 있지는 않았나요? 어머니의 밝게 웃으시는 모습에서 기쁨과 짙게 패인 주름에서는 슬픔이, 오래된 살림 도구에서는 더 잘해드리지 못하는 죄책감이, 그 모든 감정이 명명할 길 없이 섞여 한 마디를 이루지는 않았던가요? 걔 중에 가장 컸던 감정이 기쁨이어서, 엄마 얼굴 봐서 좋다는 말로 나타나지 않았나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로제의 차에 탄 폴은 방심한 태도로 라디오를 켰다. 그녀는 계기판의 창백한 빛에 비친 자신의 길고 잘 손질된 손가락에 힐긋 눈길을 주었다. 정맥이 드러나 손가락 쪽으로 돌진하며 이리저리 뒤얽혀 있었다. ‘내 삶을 반영하는 것 같군.’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손에 드러난 정맥처럼 삶은 이리저리 뒤얽혀 있고, 우리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로 뒤엉켜 있습니다. 하나로 명확할 수가 없는 우리 감정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모두 기쁨을 느낀다고 하여도 세세한 구성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삶이, 인간이, 이토록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녀는 불안했다. 그들이 저녁 6시에 만나는 게 의무 사항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그에게 할 수 있을까? 다른 한편, 매일 저녁 그가 작은 자동차에 탄 채 문 앞에서 조바심을 내며 자신을 기다려 주리라고 생각하자 그녀는 벅찬 행복감을 느꼈다…….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프랑수아즈 사강. 문제적 삶을 살면서도 그녀의 죽자 프랑스 전체가 그토록 애도했던 것은 세밀한 감정 묘사가 독보적이었던 사강 작품의 매력 때문이겠지요. 여러분은 어떠실까요? 브람스를 좋아하실까요? 그 짧은 질문에 어떤 감정의 변주를 이루실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떤 인생을, 어떤 곡을 만들어낼까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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