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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Oct 30. 2017

사랑에도 사막이 있다면,

『사랑의 사막』- 프랑수아 모리아크

  인터넷에 ‘사랑’을 검색해 보세요. 어떤 것을 기대하셨나요? 그리고 어떤 것이 보이시나요? 당연히 검색을 통해 보이는 이미지는 우리가 사랑에 대해 느끼는 가장 일반적인 느낌이겠죠. 하트 모양, 따스한 분위기, 행복한 연인의 모습, 마주 잡은 손 등. 사랑은 달콤합니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죠. 그러나 다른 이미지도 있습니다. 무릎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인 모습, 등 돌린 연인, 마침표 세 개가 따라다니는 사랑. 이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사랑을 장소로 표현하자면 어떤 곳이 적절할까요? 천국, 뭔가 로맨틱한 장소, 에덴동산 같은 낙원? 이런 이미지가 잘 어울리겠죠. 하지만 우리가 앞서 본 것처럼 사랑에는 다른 장소도 있습니다. 황량한 불모의 장소, 사막은 어떨까요? 사랑의 사막. 그곳의 사랑은 과연 달콤할까요?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사랑의 사막』을 살펴봅니다.



사랑에도 사막이 있다면,


  사랑에도 사막이 있다면, 필시 그 사랑은 만족과 완성과는 거리가 멀 것입니다. 그 사랑은 지치고, 힘들고,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사랑이겠죠. 레몽이 앉아있는 까페에 한 남녀가 들어옵니다. 순간이지만 레몽은 여자를 알아봅니다. 몰라볼 수가 없는 그녀, 마리아 크로스. 그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레몽을 쓰디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보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을 바랐지만 결국은 사막이었던 그때의 기억으로.


이 미지의 여인이 바라봐 주기 전에는, 레몽은 한낱 지저분한 애송이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우리 모두는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람에 의해 빚어지고 만들어진다. 그들의 사랑이 쉬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작품인 것이다.


  중학생 정도의 레몽은 그저 애송이에 불과했죠. 학교에서야 문제아로 취급받았지만, 그래도 레몽은 어른이 아닌 아이였습니다. 그런 레몽은 집에 가는 전차에서 어떤 여인을 봅니다. 그 여인도 자신을 봅니다. 레몽은 매일 그녀의 무언의 시선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레몽이 스스로를 바라보게 합니다. 한낱 지저분한 애송이. 그게 레몽이었으나 그녀의 눈길이 레몽을 바꾸지요. 그녀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지만, 그 전차에서의 무언의 눈길에 레몽은 남자가 됩니다.


  한 남녀의 눈길이 마주치는 일이 문제가 될 리는 없지요. 다만 문제는 레몽이 어리다는 사실과 레몽에게 눈길을 준 그녀는 부유한 남자의 정부로 평판이 매우 안 좋고, 최근에 자식을 잃은 여자라는 점이었습니다.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그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이라도 본다면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었죠. 그녀가 파렴치하게 어린 소년까지 유혹하는 여인으로 보일 테니까요.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사막입니다. 서로를 원함에도 결코 서로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지요. 레몽은 그녀를 욕망하지만, 레몽의 앳된 모습은 마리아를 죄책감에 빠뜨립니다. 레몽이 다가오기를 바라면서도 마리아는 레몽을 밀어낼 수밖에 없죠.


이 애를 단념시키려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올 것이 오고 말았다! 하지만 어떤 자책감의 독성도 마리아가 느끼는 벅찬 행복감을 다 망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레몽에게도 있습니다. 그가 방탕한 척을 하지만, 어쨌든 여린 소년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소유하고 싶은 대상이 눈앞에 있지만, 어떤 말을 걸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그녀를 가질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 미숙함이 삐뚤어진 형태로, 갑작스레 그녀를 붙잡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마리아의 저항에 너무나 쉽게 거부당합니다. 그리고 여린 소년에게 그 수치심은 뜨거운 불길에 덴 것처럼 평생의 흉터로 남습니다.


긴장한 팔의 우악스러운 움직임 하나 때문에, 레몽은 아득히 먼 곳으로 그녀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채워지지 않는 갈증


  그리고 펼쳐진 그들의 사랑의 사막. 이제 그들은 서로에게 절대 닿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레몽은 평생을 마리아에 대한 복수심으로 여자들을 정복할 것이며, 마리아는 레몽을 보내고 끓어오르는 열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희망 없는 기다림과 침묵 속에서,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격정의 매혹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것 말고 이 비참한 상황에 어떤 다른 출구가 있단 말인가?)
  이 고독한 사랑은 왜 이다지도 매혹적인가? 팽팽하던 긴장 속에서 상대가 사라지고 나자 그 사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자기의 정염의 맹렬함뿐이었다. 자신 속에 불이 휘몰아치고 있음을 느끼는 것, 오직 그것 말고는 모든 것이 텅 비었음을 깨닫는 것.


  이 사랑의 정염은 절대 꺼지지 않습니다. 태울 만한 모든 것을 태우고도 집요하게 타오르죠.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사막처럼 모든 것이 건조하고, 그 어떤 풀도 자라지 못합니다. 불이 사그라져 생긴 빈 공간에는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공허가 자리 잡습니다.



신기루는 깨어지고, 다시 사막으로


  절대로 다시 보지 말았어야 했다. 지나간 17년간의 수많은 연애는, 자기도 몰랐지만, 마리아에 대한 사랑을 꺼뜨리기 위해 놓은 맞불에 불과했다. 랑드 지방의 농부들이 산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반대편에 놓는 맞불처럼. 그러나 일단 마리아를 다시 보자, 지금까지 의식의 이면에 숨겨진 채 꺼진 척하던 불길이 순식간에 강하게 타올랐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건만, 그 찰나의 마주침으로 그들은 다시 사랑의 사막에 내던져집니다. 꺼진 줄 알았던 뜨거운 정염은 다시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활활 타오릅니다.


  사랑, 그 강렬한 욕망. 이 끝없는 갈증은 아무리 목을 축여도 사라지지 않아요. 물을 아무리 벌컥벌컥 들이마셔도 여전히 사막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아시스는 신기루처럼 순간적이고, 더 큰 갈증이 찾아오죠. 유일한 출구는 절대로 다다를 수 없으니 결국 사랑의 사막에서는 모두 방향을 잃고 헤맬 뿐입니다.


  모리아크의 『사랑의 사막』은 이런 인간의 욕망을 잘 보여줍니다. 그 가혹한 불길이 절대 꺼지지 않음을, 생 전체를 지배하고 뒤흔든다는 것을요. 이러한 욕망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심스럽게 관리하여, 맹렬히 타오르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 강렬한 욕망에 몸을 맡겨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태우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자, 여러분 내면의 불길은 어떻습니까? 아직 잠잠한가요? 아니면 타오르고 있나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사막의 출구를 혹시 찾으신 분도 있나요?


출구가 없구나. 쾌락을 아무리 만족시켜도 그다음에 채워야 할 욕망의 양이 늘어날 뿐 영원한 만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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