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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Jul 14. 2018

부둣가

[지나가는 이야기]#4

  새벽 5시.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운 방안을 알람 소리가 가득 메운다. 평소 이렇게까지 일찍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청년은 조용히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킨다. 이른 시간 이불 밖의 냉기에 몸을 웅크릴 법도 한데 청년은 이불을 걷고 침대 끝에 걸터앉는다. 여전히 불은 켜지 않아 방은 어둡다. 눈을 지그시 감고 뜨고를 반복하며 조용히 앉아 있던 청년은 예고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켠다. 그리고 이불을 정리한다. 드문 일이었다. 어차피 매일 눕던 침대였기에 굳이 이불을 정리하지 않던 그였다. 낯선 행동임에도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이불을 정리한 청년은 먼저 화장실로 향했다.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청년은 지난밤 널어놓았던 빨래를 갠다. 차곡차곡. 수건은 수건대로, 양말은 양말대로, 하나하나 모나지 않게 정리한다. 빨래 정리가 다 끝난 후, 청년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가방은 미리 꾸려놓은 터였다. 언제나처럼 네모난 파란 가방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적당히 정리하고 쓰레기를 모아 봉투에 담는다. 마지막으로 신발을 신고 한눈에 들어오는 방안을 응시한다. 집은 황량하다 싶을 만큼 깨끗했다. 불을 끄고 현관을 나섰다.

  이른 시각 지하철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졸린 눈을 비비는 사람부터,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 급하게 화장을 하는 여자. 청년은 무심한 눈으로 그들의 얼굴을 훑었다.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청년은 미리 생각해두었던 시각에 맞추어 버스를 탔다. 지하철과 달리 버스는 한산했다. 승객 다섯 명을 태우고 버스는 출발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청년은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았다.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잠을 청했다. 휴게소를 두 번 들리는 긴 여정이었지만 청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탔을 때 그 자세 그대로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부두에 다다른 것은 거의 점심때였다. 버스에 내리고도 대중교통을 두 번이나 갈아탔던 탓인지 청년은 조금 지쳐 보였다. 그렇지만 청년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방파제 끄트머리로 향했다. 아침에 침대 끝에 걸터앉았을 때처럼 육지 끝에 걸터앉았다. 눈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오가는 파도 소리가 쉼 없이 귀에 속삭였다. 청년은 가방을 옆에 내려놓았다. 잔잔한 듯 넘실대는 파도가 청년이 들이 내시는 숨결 같았다. 그래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청년의 왼편 살짝 떨어진 거리에 한 남자가 앉았다. 그 남자는 청년보다는 확실히 나이가 있어 보였다. 청년처럼 그 남자는 자신의 네모난 회사 가방을 옆에 내려놓았다. 회색 양복 차림에 머리는 부스스했고 면도를 하지 못한 탓인지 수염이 삐쭉였다. 그 남자도 지쳐 보였고, 청년처럼 바다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파도는 넘실거리고, 새들은 유유히 지평선을 가로질렀지만, 청년과 남자의 시간은 멈춘 듯 보였다. 이따금 크게 숨을 들이쉴 때 말고는 청년과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진 않았지만 점심이 훌쩍 넘은 것 같았다. 청년은 배에서 울리는 소리를 느꼈다. 배는 고프지만 배를 채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배에서 나는 소리를 그냥 파도 소리에 묻었다. 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남자가 일어나 있었다. 여전히 시선은 바다를 향해있었고, 옆에 놓았던 회사 가방을 집어 들고 서있었다. 그러고 갑자기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입을 다문 채 가방을 들고 있던 오른손을 청년을 향해 들썩였다. 청년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여전히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청년도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제야 남자는 뒤를 돌아 걸어갔다. 청년은 남자의 뒤를 따랐다.

  남자와 청년이 들어간 곳은 부둣가 옆 어디에나 있을 법한 국밥집이었다. 남자는 먼저 자리에 앉아 국밥을 두 그릇 시키고, 청년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다시 가방을 옆에 놓고 청년은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남자는 입구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고, 청년은 낯선 곳에서의 낯선 가게 안을 조금 둘러보았다. 국밥이 나왔다. 남자는 말없이 수저를 뜨기 시작했다. 깍두기를 우적우적 씹으며 수저를 입에 넣었다. 청년도 수저를 들었다. 첫 수저를 입에 넣고서야 청년은 잊고 있던 배에서 나는 소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몹시도 배고팠음을 깨달았다. 조금씩 빠르게 국밥을 떠먹었다. 수저가 뚝배기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이 허겁지겁 먹고 있는 사이 어느새 남자는 국밥을 다 먹고 다시 입구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도 국밥을 다 비웠다. 남자는 흘긋 청년이 다 먹음을 확인하고는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청년이 자기 몫을 낼 셈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자 남자는 청년에게 손사래를 치더니 어찌할 새도 없이 국밥 두 그릇을 모두 계산했다. 

  청년과 남자는 가게를 나왔다. 역시나 말없이 바다를 보던 남자는 청년을 거의 쳐다보지도 않고 손만을 뻗어 청년의 어깨를 투박하게 두드렸다. 그리고 도보를 따라 사라졌다. 청년은 남자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남자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바다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래 걸리진 않았다. 남자가 사라진 길을 따라 청년도 걸음을 옮겼다. 네모나고 파란 가방을 멘 채. 

  청년은 다시 버스를 탔다. 또 오랜 시간이 걸릴 여정이었다. 차창 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모습을 보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전과는 다른 이유와 다른 마음으로 시간이 빨리 흘러 도착하기를 바라며 잠에 들었다. 

도착한 시각은 퇴근시간을 조금 넘긴 때였다. 아침에 지나온 길을 거슬러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하품을 하는 사람, 이미 졸고 있는 사람, 화장을 고치는 여자. 청년은 그들의 삶을 눈여겨보며 집으로 향했다. 

  집안은 차가웠다. 겨우 한나절 집을 비웠을 뿐인데 집안 공기는 냉랭했다. 아침에 정리하고 나가서 깨끗이 치워진 방 때문인지 모르겠다. 발바닥에 서린 기운이 느껴졌다. 청년은 불을 켜고 보일러를 틀었다. 세수를 하고, 발을 닦았다. 작은 방안이 금세 따뜻해지고 있었다. 청년은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가방을 뒤적였다. 가지고 갔던 그리고 이제는 의미 없는 조촐한 물건들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외투 주머니 속 편지봉투를 꺼냈다. 언젠가는 필요하겠지만 역시나 지금은 쓸모없어진 봉투였다. 청년은 봉투를 책상 하단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아침에 정성 들여 정리했던 이불을 폈다. 마치 새 이불을 덮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았다. 낮에 보았던 바다가 떠올랐다. 끊임없이 귓가를 간질이던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던 국밥이 생각났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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