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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Oct 01. 2020

사라져 갈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낱장 일기05

사라져 갈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오늘 벌초를 했다. 지난해에 이어 내게는 두 번째 벌초였다. 추석이 다가오는 이맘 때면 그래도 아직 한참 햇빛이 따가워 벌초는 보통 새벽 일찍 시작한다. 막 입을 수 있는 옷과 가시에 뜯기지 않는 바지, 발목을 가리는 긴 양말, 햇빛을 막아주는 넓은 모자와 목에 두른 흰 수건까지. 잘린 풀을 긁어모을 갈퀴를 어깨에 메고, 한 손에는 차가운 얼음물이 든 아이스박스를 들고 산에 오른다. 도심 속에서 당연하게 걷던 단단하고 평평한 바닥이 아닌 허리까지 오는 각양각색의 풀과 굴곡진 흙을 밟으며.
도착해서 본 묘는 겉으로 봐서는 전혀 묘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무엇이 그리도 아까운지 빼곡히 풀이 들어서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소리와 벌레들의 우는 소리, 가깝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소리의 전부인 이곳. 예초기의 엔진 소리가 그 모든 소리를 덮어버리며 벌초가 시작된다.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 것만 같은 높다란 풀들의 위시적 모습과 위험한 속도로 돌아가는 예초기 칼날을 휘두르는 인간, 그 숙명적 대비를 뭐라 설명해야 할까. 그것은 내게는 모순 그 자체로 보였다.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와 모든 것을 뚫은 창의 대결. 단순히 벌초라는 결과물로 생각하면, 후자의 압도적 승리 같기도 하지만, 기나긴 시간의 관점에서 자연은 그 맹렬한 생명력으로 더 많은 승리를 선점한다. 그렇게 지치지도 않고 자라나는 풀을 보면 생에 대한 그 지독한 집착이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인간의 의지는 그에 반해 어찌나 초라한지.
필멸의 존재로 태어난 인간이기에 우리가 간직해 온 많은 것들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벌초도 그중에 하나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보다 머지않은 시간에 곧, 벌초는 그저 단어로 남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공유하던 조상에 대한 뿌리 깊은 유대감은 오늘 아버지가 흘린 땀방울처럼 땅 속에 스며들어 옅어져 가고, 남은 세대는 점차 오늘 같은 순간을 위해 땀을 흘리지 않는다. 더 이상 깎이지 않을 풀에 뒤덮일 묘들. 사람이 찾지 않는 산. 그곳에서 계속 울릴 풀벌레 소리. 내게는 오늘의 벌초 속에서 그 모든 미래의 가능한 모습들이 겹쳐 보였다.
아침 일찍 시작한 벌초는 점심시간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짧게 깎인 풀 위에 앉아 모자를 벗어 넘기자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어루만진다. 얼마 남지 않은 얼음물을 들이켜고, 고개를 들어 가능한 멀리 시선을 던져본다. 어느 쪽으로나 드넓은 푸른 하늘이 내 머리 주위를 둘러싼다. 그리고 그 낮게 깔린 산은 푹신한 진초록 스펀지 같기도 거대한 브로콜리 같기도 했다. 벌초가 끝난 자리, 그 모든 커다랗고 푸른 여유 속에서, 맛보기 어려운 자유와 약간의 그리움을 느끼며, 나는 사라져 갈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0919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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