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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낱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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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Oct 21. 2020

그러나 우리는 곧 돌아가야 했다.

낱장 일기06

약속이 있었다. 지하철을 나와 조금을 걸어 도착한 카페는 새하얀 외관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카페 내부를 보여주는 커다란 통유리와 그 양 끝에서 일렁이는 하얀 커튼이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주었다. 화창한 날이었다.

카페에서의 시간은 언제나처럼 그간 밀려온 서로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웃음과 슬픔과 아련함, 청승맞음이 대화를 스쳐갔고, 그때마다 쨍한 햇빛이 우리의 자리 옆에서 뜨거운 경계선을 만들었다. 

나는 쾌적한 실내에 있으면서도 자꾸만 그 선을 넘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선을 넘으면, 바닥을 뜨겁게 달구는 열기에 등에 땀이 주르륵 흐를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빛나는 유혹은 그 밝기만큼이나 강렬했다. 

밖으로 나와 조금 걷기로 했다. 너무나 화창한 날이었기 때문이었고, 이대로 그늘진 집으로 돌아가기엔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 마음을 바쁘게 만든 대로변을 피해 부러 한적한 골목으로 걸었다. 나뭇잎을 만나지 못한 빛들이 패턴을 알 수 없는 무늬처럼 어깨를 스쳐 지나갔고, 때로는 낮은 건물들이 드리우는 레고 블록 같은 그림자가 허벅지를 덮었다.

일자로 쭉 뻗은 길의 끝은 너무나 빨리 왔고, 아직 햇빛과의 동행이 끝나지 않았기에 우리는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다. 목적이 없는 걸음에서 주어지는 충만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어느덧 우리는 공원 초입으로 들어섰다.

공사로 폭이 좁아진 야트막한 언덕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잔잔한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그 옆에 초록의 공원이 펼쳐져 있었다. 나무 그늘 밑에서 햇볕을 피할 수 있는 북적한 주변부를 제외하고, 잔디밭이 펼쳐진 공원 한가운데에는 어디 하나 소외된 곳 없이 모든 풀잎과 메마른 흙까지 햇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면면히 마스크를 쓴 채 찌푸린 얼굴 하나 없이 제각기의 속도로 팔다리를 느리게 휘적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 역시 그 빛의 퍼레이드에 몸을 던져 팔다리를 조금 휘적였는데, 발걸음을 따라 바스락거리는 대지의 메마른 소리가 그 어떤 때보다 생동감 있게 느껴져 웅성거리는 그 공원에서도 그 소리를 깨끗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곧 돌아가야 했다. 짧은 산책이 일탈이 되어버린 우울한 일상으로, 누구도 반겨주는 이 없는 침묵이 깔린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기에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푸른 나무와 파란 하늘과 새하얀 빛을 눈으로, 땀을 식혀주는 투명한 바람을 맨살이 드러난 목으로, 지근거리는 땅의 소리를 발로 들으며 우리는 돌아가야 했다. 언젠가 다시 나와 걸을 자유로운 날을 소망하며.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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