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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Oct 23. 2020

스쳐가는 일상이 아름다움을 내보이는 날들이 있다.

낱장 일기07

01

스쳐가는 일상이 아름다움을 내보이는 날들이 있다. 전혀 새로울 것 없지만 마치 어제의 익숙함과는 결별을 고하듯 상쾌하게 빛나는 오후의 풍경.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전보다 더 진한 물감이라도 사용한 것처럼 모든 것이 각자의 색을 오롯이 내뿜고 있었다. 오후의 따스한 태양은 선연한 그 색색들을 한데 모아 넘치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조화를 선사했다.

시간만 있었다면, 그럴 여유만 있었다면, 그리고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어디 벤치에 앉아 그 아름다운 화폭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싶었다. 그러지 못해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오늘의 아름다움이 더 크게 다가오는 데에 이유가 있을까. 어쩌면 단순히 날이 좋았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기도 하지만, 오늘 느낀 감정에는 무언가 더 있을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귀양살이의 감정으로 하루를 버티고 있다. 전염병에 대한 공포심, 타인에 대한 경계, 우리의 일상은 예민함으로 가득 차 있고, 더는 편한 마음으로 만남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족쇄에 매여 있다.

사람이 사람과 이어질 수 없는 시대. 어쩌면 나는 오늘의 일상에서 우리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아름다움이라는 이미지로 찾아내었는지 모른다. 서로 가까이 손을 뻗지는 못하지만, 같은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공통의 감정. 그 순간 말을 나누지 않아도 많은 것이 암묵적으로 이해되는 합일의 시간. 그렇다. 나는 오늘의 아름다움에서 삶을 초월하는 하나의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02

버스를 기다리며 선 장소가 눈에 익었다. 회색의 높은 건물, 층마다 달려있는 학원 간판들, 병원을 연상시키는 널찍한 입구와 왼편의 자그마한 테이크아웃 커피점. 언젠가 본 적 있는 풍경이었기에 내 눈은 빠르게 과거를 바라본다. 그러자 친한 동생이 떠올랐는데 이곳은 지난날 그 친구가 절박하게 공부하던 동네였고, 그리고 언젠가 이 장소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었다. 불과 몇 년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지만, 마치 오랜 옛날처럼 향수를 품은 풍경이었다. 간만에 동생에게 연락을 했다. 그 익숙한 풍경의 사진을 함께 보내며.

어떠한 예감도 없이 들이닥치는 이미지의 기억은 가끔은 당혹스럽기도 하다.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눈은 풍경을 추억하며 잊고 살아온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 든다. 9월 3일 오후의 시간 속에서 겹친 형태로 나타나는 과거의 오후. 순간의 기시감이 실제 과거의 한 귀퉁이였다는 사실. 그것은 정겹지만, 지나가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하기도 한다.

나의 기억은 장소를 쌓아간다. 그리고 나의 눈은 장소를 기억한다. 현재의 답답함은 자꾸 지난 과거를 들먹이게 한다. 기억 속에서 평온했던 날들, 풍경에 오로지 무해한 것만 남기는 무의식의 가위질.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과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지나간 날들은 언제나 아쉽고, 내 삶의 가능성이 가장 넘쳤던 순간들이었기에 나는 자꾸만 뒤로 걷고 싶어 진다. 자꾸만 뒤로. 지나간 장소들에서 당신들을 떠올리며.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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