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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낱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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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Oct 25. 2020

남자는 새벽에 깨어 있다.

낱장 일기08

남자는 새벽에 깨어 있다. 베란다 밖으로 자잘한 울림이 들린다. 비가 오고 있다. 남자는 베란다를 살짝 열어 그 조그만 틈 사이로 밖을 바라본다. 빗소리가 더욱 세차게 들린다. 비는 얇은 철판을 쉬지 않고 두드린다. 그로 인해 빗소리는 다양한 음계로 집 밖의 세상을 연주한다.

남자는 빗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앉아있다. 패턴이 없이 반복되는 그 불규칙한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앉아있다. 남자는 어쩌면 그 소리로부터 무언가를 찾으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빗소리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그것이 남자에게 어떤 심상 및 의미를 불러일으킨다면 그건 남자의 자의식으로부터 나온 결과물이다. 

남자의 눈에 무언가 들어온다. 회색의 모직 암막커튼에 회색보다 짙지만 검은색은 아닌 점이 움직인다. 남자는 고개를 내밀어 쳐다보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자리에서 잠시 일어나 자세히 본다. 새끼손톱 절반만 한 짙은 회색의 거미가 암막 커튼에 붙어 기어간다. 남자는 두루마리 휴지를 찾아 휴지 한 칸을 뜯어 거미를 잡는다. 뭉개진 거미는 구겨진 휴지에 싸여 새하얀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그리고 빗소리를 듣는다.

빗소리가 잦아든다. 차 몇 대가 빗물을 가르며 지나간다. 새벽 6시.

남자는 잠깐 일어난다. 무언가를 하려는 듯 몸을 기울여 한 발을 뻗는다. 그대로 잠시 멈춘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빗소리가 더욱 잦아든다.

남자는 왼다리를 꼬고 눈을 감는다. 턱을 어루만지면서 오른쪽 팔꿈치를 의자에 기댄 채로.

남자는 빗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빗소리는 점점 더 작아진다. 아까의 강렬한 쏟아짐은 사라지고, 처마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간격으로 비는 멈추려 한다. 

비가 그치자 남자는 눈을 뜨고 허리를 곧추 세운다. 반쯤은 감긴 눈으로 잠시 공간을 응시하던 남자는 고개를 조금 끄덕이더니 베란다를 닫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의 불을 끈다. 남자는 침대에 몸을 뉘다. 침대 근처의 안대를 집어 눈을 가리고, 잠을 청한다. 빗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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