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낱장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락서 Oct 26. 2020

모순을 긍정하면서 부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낱장 일기09


당신은 한 집단에 속해있다. 이들은 정의를 우선 가치로 삼고, 자유를 신봉하며,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강하게 추구한다. 집단은 자신들이 바라는 이상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고, 당신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당신의 선택은 철저히 당신의 신념 하에 따라 자유롭게 이뤄지지만, 선택 이후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결과는 오롯이 홀로 짊어져야 한다. 그것은 타협 불가능한 결론이며, 혹여 그것에 타협이 뒤따른다면, 모든 전제가 무너지게 된다. 당신은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그것이 당신과 당신이 속한 집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만약 그 일을 성공한다면, 다양한 형태를 갖지만 종래 한 가지를 의미한다. 죽음.

많은 이들의 행복과 자유를 위한 단 하나의 살인. 더 이상의 살인이 없기 위해 행해지는 살인. 카뮈는 ‘정의의 사람들’에서 묻는다. 이 숨 막히는 모순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인간은 신념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까? 그리고 거기엔 어떤 논리적 정당성이 부여될 수 있을까?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누군가를 해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면, 목적과 상관없이 모든 폭력은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 맞는가?

왜 그토록 많은 철학자들이 자명한 하나의 논리를 갈망해왔는지 알 것 같다. 모든 이야기에는 너무 많은 관계들로 가득 차있으니 하나의 논리는 결코 모든 경우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렇게 절대성을 잃어버린 논리는 상대적인 것으로 남아 수많은 사상들의 무덤에 편입되고 마는데 절대성을 잃으며 유일한 광채 역시 같이 잃어버림으로 더 이상 개별성을 띠지 못하는 구분되지 못하는 덩어리로 남게 된다. 시대를 타고 일순간 빛을 발하는 것들도 있었으나 결코 그 시대를 넘어 빛나지 못했고, 우리는 그 수많은 선례들의 더미 위에 또 다른 사례를 묻어간다.

그간의 경험들로 절대적인 논리가 불가능함을 깨달은 인류에게 어떤 희망이 남아있는가. 전부가 아니면 무. 이 양극단의 논리에 우리가 위치할 수 있는 곳은 요원하기만 하다.

역사 속에서 전부를 선택한 이들도 있었고, 무를 선택한 이들도 있었다. 철저한 극성을 띠며 서로를 밀어내던 이들이 실상 그리 다르지 않은 이란성쌍둥이의 모습을 보여주었음은 또 하나의 모순이다.

어쩌면 이 아픈 깨달음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위치는 전부와 무 사이 어딘가. 양극단의 방향으로 향하는 역동적 위치다. 이를 단순한 기계적 중립과 혼동하면 안 된다. 기계적 중립에는 어떤 모순도 없고, 고뇌도 없으며, 그에 따른 고통도 없다. 만사에 대한 판단 유보로 인한 마취 상태에 빠진 중립은 죽어있는 것과 다름없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선택한 방향을 향해 일관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태생적인 한계로 인한 모순을 자투리 없이 견디는 것이다. 당신은 그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싸움을 견뎌야 하고,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쳐질 위험을 경계해야 하며, 그에 따른 모든 부수적인 결과 역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 광증에 빠져버릴 것만 같은 지난하고, 외로운 싸움 속에서만이 최소한 완전한 실패를 피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당신이 과거와 현재 미래에 겪는 모든 모순을 긍정하면서 부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전투에서 승리도 패배도 경험하지 않는 방법은 끝없이 싸우는 것뿐이다.


0904

매거진의 이전글 남자는 새벽에 깨어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