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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Oct 30. 2020

카뮈의 희곡 '오해'를 읽고

낱장 일기11

금일 카뮈의 ‘오해’라는 극작품을 읽었다. 불과 몇 페이지를 넘어가기도 전에 익숙한 느낌이 들면서 이야기의 전개가 훤히 머릿속에 펼쳐졌다. 카뮈의 글이 뻔하다거나 아니면 내가 천재 같은 직감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이미 이전에 들어본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간단한 요약으로 짤막하게 들어온 이야기의 원작이 카뮈의 ‘오해’였다니. 그 신선한 충격. 마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행복한 왕자’, 제비가 왕자의 부탁으로 옷을 벗겨먹는다는 이야기(?), 의 작가가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의 그 ‘오스카 와일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와 같은 놀람.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고 하지만, 읽기에 지루하거나 뻔하다고 생각 들진 않았다. 뻔하다니, 그럴 리가. 요약으로 들어왔던 이야기가 탈무드 이야기 중 하나인 것만 같은 평범한 교조적 이야기처럼 느껴진데 반해 카뮈의 글은 단순한 교훈을 넘어선 사유를 저 깊은 늪으로 데려가게 만드는 글이었다.

좀 더 깊게 시간을 들여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지만, 지금 바로 이 순간 잠깐이나마 고찰을 시작해보자. 마르트는 어째서 사람을 죽여놓고도, 그것도 저의 오빠를, 그렇게까지 뻔뻔하게 겉으로 일말의 무너지는 기색 없이 심지어 자신이 죽인 오빠의 아내가 찾아왔을 때까지 흡사 당당한 태도를 보였던 것일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체념? 혹은 악에 물들 대로 물들어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라서? 둘 다 마르트를 너무 평면적인 인물로 치부해버리는 것 같다. 그녀가 내뱉는 문장들은 비정하지만 나름의 사유를 갖고 있다. 어쩌면 자신이 꿈꿔왔던 따스한 모래가 펼쳐진 바닷가로의 열망, 그것은 마르트에게 있어 참된 인생의 궁극적 표상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여관의 비참한 생활, 삶을 최대한으로 즐기지 못하는, 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강렬한 갈망. 목적을 쟁취하기 위한 가면을 뒤집어쓴 연기와 정복자적인 태도. 이는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한 인간을 언급하며 분석한 돈 후안, 연기자, 정복자의 이미지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더욱이 그 무자비한 돌진의 결과로 자신의 하나뿐인 가족이었던 어머니의 사랑마저 잃게 되었으니 마르트의 살인은 자신에게도 비극의 향내를 피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눈물 어린 참회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냉정함을 가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무엇보다 마르트에게 후회는 자신이 저질러왔던 지난 모든 살인들에 대한 논리를 없애는 일, 자신이 목표로 삼은 것에 대한 부정이었을 테니. 마치 카뮈의 다른 저작 ‘칼리굴라’의 칼리굴라처럼 어떤 가변적인 가치(도덕, 미덕 등의)를 따르기보다는 자신이 정한 논리를 끝까지(이게 중요하다) 밀고 나가는 모습. 마르트에게서 그런 모습이 엿보인다.

카뮈의 대부분의 저작이 그러하듯 아름답고 행복한 결말은 ‘오해’에서도 찾기 어렵다. 부조리에 대한 논고에서 그가 말했듯 인간은 희망이 없는 삶에서 희망을 품는 모순을 품고 살아야 하는 존재인만큼 비극은 우리네 삶 속에 내재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카뮈는 언제나 사랑을 하나의 대안처럼 여겨왔고, 삶의 행복을 지속적으로 고찰해왔던 만큼 그의 많은 저작이 비극적인 냄새를 풍긴다고 하여, 단순한 염세주의로 치부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비극일지라도 끊임없이 우리의 삶의 조건을 되새기고, 눈을 부릅뜨고 반항 어린 시각으로 대면해야 할 의무가 있는바 삶을 쉽게 만드는 모든 평준화, 일반화를 거절하며 삶을,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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