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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타일

2025년 2월 11일 열 여섯 번째 일기

by 무무

웃음이라기보다는 좀 아찔했는데, 가까이서 본 나는 비극이었지만 멀리서 본 나는 희극이었을 모습이라 기록해 본다. 시트콤에서 당시의 내 모습과 유사한 상황을 봤다면 웃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평소보다 조금 바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시간 조금 넘게 늦은 퇴근에 집에 오자마자 대강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별 것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밤이라, 후다닥 샤워를 시작했다. 평범한 시간이었다. 고작 1mm 움직였을 뿐인데 얼음물과 끓는 물을 넘나드는 샤워기와 한창 씨름을 할 때였다.


빠지지지직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쩌저저저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딘가에서 갑자기 굉음이 울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안경을 쓰는데, 아예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건 아니지만 블러처리를 좀 강하게 한 수준이라, 뭐가 어디서 문제가 터진 건지 한눈에 알 수가 없었다. 선반 괜찮고, 세면대 괜찮고, 변기 괜찮고. 마침내 발견했던 건, 화장실 문 옆의 타일이었다. 문 바로 왼쪽의 타일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것이다. 지금에서야 타일이 튀어나왔다고 알지, 그때는 벽이라도 휘거나 무너진 줄 알았다. 잘 보이지 않는 시야로 봤을 때는 정말로. 그래서 머리에 샴푸도 채 씻어내지 못한 채로 일단 화장실에서 벗어났다.


쩌적, 하는 소리가 멈추고 어느 정도 지나서야 화장실을 나와 조금 떨어져 쪼그리고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안쪽을 확인했다. 아마 겨울이라 난방의 반복과, 샤워를 할 때 화장실에 차는 뜨거운 공기 등의 영향으로 타일을 붙이는 접착제가 떨어졌거나 했을 것이다. 일단 사진을 찍어 집주인 분(어머니/이모)에게 전송하고, 조심스럽게 들어가 마저 몸을 씻었다. 아무래도 씻기는 해야 하니까. 거품이 남은 머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혹시 타일을 겨우 붙잡고 있는 접착제가 끝내 떨어져 샤워하는 나를 덮칠까 하여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씻었다. 문과 샤워 공간이 멀어서 다행이었다.


평소보다 빠르게 씻고 난 뒤, 집주인 두 분에게 연락을 했다. 사실 시간이 늦어서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없기에. 집주인 한 분(어머니다.)을 통해 전체 건물과 관리비를 담당하시는 총무님께 우선 연락을 드리고(공용으로 사용하는 유지보수비가 있어 해당 비용으로 처리될지) 일단 그대로 내버려 뒀다. 테이프라도 붙일까 하다가 관뒀다. 괜히 건드렸다가 오히려 떨어지면 바닥에 바스러질 타일 조각들이 더 큰일이었다. 문제는 이번 주는 회사 일도 바쁘고, 약속도 잦아 집에 붙어있는 시간이 없다는 거다. 평소 일요일인 데이트도 하필 이번 주는 토요일이다. 며칠 더 버텨주길 기도해 본다


문득 생각해 보니 이 집에 들어와 산 지도 7-8년 정도 되었다. 당시 신축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시간이면 고장 나는 곳이 한두 개쯤 생기기 마련인 것 같다. 한 동안은 더 머물러야 할 공간이니, 조금씩 고쳐가며 살아가야겠지.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지어진 지 거의 10년 가까이 된 것 치고는 오히려 지금까지 별문제 없이 지내왔던 것 같기도 하다. 예상치 못한 지출이 발생하게 생겼지만, 비용은 좀 지불해도 좋으니 빨리 고쳐지길. 샤워하다 굉음에 뛰쳐나간 추억 하나가 적립됐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화장실에 대한 얘기를 썼다. 다만 어제는 복구, 오늘은 파괴다. 파괴는 나로 인해 생긴 일은 아님에 차이가 있다. 집에서 가장 좁은 그 공간에 요즘 사건사고가 많다. 화장실은 확실한 개운함과 청결함을 주는 아주 중요한 곳인데 말이다. 뭐, 배출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우울은 수용성이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따뜻한 물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후, 좋아하는 바디워시나 미스트를 뿌리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는 거다. 잘 하지 않았지만, 조금 신경 써서 청소를 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오늘의 쿠키 사건 같은 느낌으로 갑자기 자기 직전인 지금 나를 분노하게 하는 일 하나가 생겼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대나무숲에만 넌시시 말해두었다. 씩씩대던 와중, 12시가 지나 습관적으로 오늘의 운세를 확인했다. 오늘의 운세는 무난했으며, 주간 운세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갈등과 대립이 발생할 수 있으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다면 오히려 여러모로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덕분에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악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믿어야지. 그럼, 오늘의 마무리는 분노였으니 부디 내일은 보다 확실한 웃음이 생기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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