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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 한 줄 알았던 날의 펑크린

2025년 2월 10일 열 다섯 번째 일기

by 무무

애매한 날이다. 웃는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어느 때처럼 실없는 농담이나, 인터넷 밈을 보고 몇 번쯤은 폭소를 터트리는 시간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 하면 마땅하게 떠오르지가 않는 거다. 언제나 새로운 하루이지만 매일을 새롭게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이다. 학생 때나, 지금이나. 규칙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그 일은 깨어있는 시간의 70% 정도를 차지한다. 나머지 30% 마저도 밥 먹기, 이동하기, 차 한 잔 하기 등등 비교적 가벼우면서도 필수적인 일들을 차지하다 보면 하루에 온전히 나를 위해서만 쓸 수 있는 시간은 채 한, 두 시간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늘상 형태가 있는 웃음과 행복, 그것도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부류의 것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전부터 좋아하던 웹툰이나 만화를 보든, 핸드폰을 잠깐 하든, 집안일과 청소를 하든, 게임을 하든, 반복적으로 힐링을 위해 하던 것들이 있고, 대체로 많은 일자에서는 이렇듯 이미 경험에 의해 나를 즐겁게 함이 확실한 요소들로 시간을 채움으로서 하루를 살아갈 원동력을 얻는 거다. 구구절절 많이 적기는 했지만 결론은, 무난한 날이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은 없는. 아마 지나고 나면 머지않아 흔적도 없이 잊혀질 흐릿한 날.


좀 웃긴데 이걸 적다 보니 갑자기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도 기록해 볼 만한 꽤나 괜찮았던 웃음이. 어제 음주 후 귀가하여 집에서 씻다 보니 세면대가 막혔다. 현재 우리 집 세면대는 (이름을 잘 모르겠는데) 세면대 구멍에 딸칵하고 끼우는, 눌러서 딸칵하면 세면대를 막고, 딸칵하면 다시 올라와서 물이 내려가도록 하는, 그게 고장 나 있는 상태다. 아마 고장 난 지 1년은 넘었을 텐데, 생활하는데 딱히 불편함이 없어서 방치하던 와중이었다. 아마 그로 인해 무언가 머리카락 같은 이물질이 걸러지지 못하고 냅다 버려지다 막힌 게 아닐까 싶긴 했다. 하필 또 음주 상태에서 막히다 보니 제대로 뚫지도 못하고 아침이 밝았다. 혹시 자연스럽게 뚫려주지는 않을까 하고 아침에 물을 켰지만 조금 내려가는가 싶더니 다시 올라오는 모습에 조용히 밸브를 잠갔다.


집에 오는 길에 펑크린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펑그린은 제품 이름인데, 다들 그냥 그렇게 부르더라. 대일밴드처럼. 회사에서 오늘 펑크린을 사려고 한다는 발언을 통해 장기간 펑크린의 이름을 찾아 헤매던 동료분에게 새로운 정보까지 전달할 수 있었다. 소소했다. 누군가 펑크린이 잘 내려가기는 하는데 관을 부식시킬 수 있다는 얘기가 있다며 또한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유익했다. 평소의 귀갓길에서 살짝 틀어 다이소에 들렀다. 처음엔 펑크린만 사려고 했으나, 습득한 새로운 정보를 통해 다른 도구에게도 눈을 돌렸다. 첫 번째는 작은 뚫어뻥. 어쨌든 뚫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제품이니 어쩌면 세면대에도? 하는 마음이었다. 두 번째는 세면대 거름망. 이건 뚫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지만, 딸칵이(여전히 이름을 모른다.) 대신으로 쓰기 좋아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배수구 청소기라는 이름으로는 뭔지 가늠할 수 없는 아주 기다랗고 뾰족한 돌기가 있는 고무 막대.


긴가민가 하면서 사봤는데 화학적 처리보다 일단 물리적 처리를 먼저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환복 후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긴 막대를 쑥 넣는데 절반 정도밖에 안 들어가는 거다. 이게 뚫리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서 물을 살짝 틀어놓은 채로 뺐다 넣었다를 반복하다 보니 뾰족한 끄트머리에 차마 묘사할 수 없는 덩어리가 딸려 나왔다. 웁스, 하며 덩어리를 제거해 주고 몇 번 더 쑤시다 보니 안쪽에서 무언가 아귀가 맞는 소리, 쇳소리 등이 들리더니 우르르릉, 하며 쌓여있던 물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리적 처리가 통했던 것이다. 몇 번 더 왔다 갔다 하고, 물을 콸콸 틀었음에도 정상적으로 모두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후 수고한 막대를 한 번 헹구어 화장실 청소용 솔의 솔 부분에 끼워두었다. 세면대에 남아있던 찌꺼기를 닦아 물로 흘려보내고, 세면대 거름망까지 끼워주니 아주 완벽한 처리가 되었다. 혼자 산 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 점점 생활의 노하우가 생기는 기분에 뿌듯함과 흐뭇함이 섞인 웃음이 나왔다.


결국 펑크린을 제목으로 달았지만 그는 사용되지 않았고, 배수구 청소기라는 이름은 아쉽지만 성능은 확실한 제품이 우리 집 세면대를 구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세상엔 참 다양한 제품이 생겼구나 싶었다. 어렸을 땐 펑크린이고 뭐고 없었으니 그저 락스를 부어서 해결했고, 배수구 청소기라는 이름의 막대는 아마 암암리에 사람들 사이 긴 막대로 쑤셔서 뚫어봐라 라는 정도의 소문으로만 존재했을 것이다. 이처럼 구부러진 배수구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게 탄성이 있는 재질로 만들어지지도 않았겠지. 이 놀라운 생활의 발전은 내게 웃음까지 가져다주었다. 속이 아주 후련했으니 말이다. 그럼 내일도 후련한 일, 웃을 일이 꼭 하나쯤 생기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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