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9일 열 네 번째 일기
하루 지난 일기다. 올해 들어 열심히 절주를 했는데, 어제는 좀 많이 마셔버리는 바람에 집에 돌아와서 씻자마자 기절했다. 심지어 머리도 안 말리고 잠들었는데 일어날 때까지 안 말라 있어 드라이기로 말려줘야 했다. 자정이 넘거나 할 정도로 늦게 들어온 건 아니라서, 이렇게까지 축축할지는 몰랐다. 자연 건조로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이야. 그래서 지금은 달이 지나고 해가 다시 떠 버린 다음날이지만, 그래도 하루 전 날 정도의 기억은 아직까지 가지고 있기에 느지막이 끄적여 본다. 어찌 되었던 일기니까, 지금부터 시점은 현재인 척을 좀 해봐야겠다.
오늘은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했다. 만두 전골을 먹고, 길거리를 구경하고, 플스방에 가서 게임을 하고, 저녁으로 곱창을 먹으러 갔다. 사건은 그를 만나기 위해 A 역을 향해 가던 중 발생했다. 나는 3개 역, 남자친구는 4개 역이 남아있었는데, 나는 이미 환승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는 1-1-2의 극악 환승을 해야 했다. 당연히 내가 일찍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초록색 호선에 탑승했다. 3개 정도면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 볼 정도의 시간이라, 아마 웹툰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조금 지났을까, 고개를 들어 역을 확인했다. 때마침 딱 세 번째 역을 향해 가던 중이었다. 반대편으로.
시간은 돈이라고 했으니, 나는 3개 정거장을 지나는 10분어치의 돈을 바닥에 버린 셈이 되었다. 먼저 도착할 줄 알았던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하게 되는 것은 덤이었다. 내 멍청함이 웃겨서 남자친구에게 더 멀어졌다고 말했다. 뻔뻔하게도 ‘자기가 기다릴 기회를 주려고 그랬어,’라고 얘기했는데 잘했단다. 비꼬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오구, 잘했어.’나, ‘가끔은 사람 같은 실수도 해 줘야지.’라고 말했다. 참고로 보통 남자친구는 약속 장소에 5분 내지 10분 길면 1시간까지도 늦기 때문에 내가 많이 넘어가 줬던 편이라(물론 잔소리는 하지만) 더더욱 착하게 말했을 것이다.
오늘의 멍청 비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약속 장소로 돌아가던 도중,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고자 미리 점심을 먹을 식당의 위치를 지도에서 찾고 있는데, 또 때 마침 휴무일인 거다. 보통 데이트를 하기 전 식당은 미리미리 알아놓는 편인데, 하필 오늘 둘 다 휴무일을 챙기지 못한 것이다. 배는 고프니 어서 다른 식당을 검색했는데, 원래 만나기로 한 역보다 하나 덜 가서였다. 남자친구는 이미 만나기로 했던 역에 도착해 있었고, 나는 그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하나, 만나서 걸어가자. 둘, 내가 먼저 가 있겠다. 하필 또 날씨가 영하 10도 언저리의 한파라, 그는 나에게 선택권을 주었고 나는 미안한 마음을 살짝 담아 두 번째 안을 택했다.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휴무일인 식당을 찾은 사람은 남자친구였으니, 완벽히 체크하지 못한 그의 잘못도 있는 것이 아닐지?
뭐, 조금이라도 행운을 찾자면 내가 먼저 식당에 도착했고, 약간의 웨이팅(급히 찾았음에도 맛집을 잘 찾았다는 증거)이 있었으나 금방 자리가 났으며, 남자친구가 오기 전 미리 메뉴를 시켜놓았다는 것 정도. 겨우겨우 만난 그는 한 정거장 정도를 걸어오느라 볼이 빨갰고 차가워서, 얼른 손으로 녹여줬다. 그 뒤로는 만두전골이 맛있어서 해피 엔딩. 주제와는 어긋나지만 소소한 에피소드도 하나 있었다.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먹고 있었는데, 옆에서 냄비 뚜껑을 가져가시던 종업원 분이 내 팔을 쳐버렸다. 국물은 그대로 내 바지레 떨어졌다. 살짝 뜨거운 국물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오늘의 바지는 새까만 색이었고, 두께가 있어 그다지 뜨겁지도 않았다. 너무 미안해하시길래 괜찮다고 했는데, 콜라 한 캔을 서비스로 주셨다. 이러면 또 완전히 용서해야지.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가끔 이런 멍청 비용을 쓰게 될 때가 있다. 오늘은 시간이었지만 실제로 돈으로 쓸 때도 있는데, 나는 그게 보통 지하철에서다. 개찰구를 통과하고 나서 내가 탈 호선의 위치가 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 그냥 개찰구 안에서 돌아 걸어가면 될 걸 다시 개찰구를 나와서 다른 개찰구로 굳이 굳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진짜 웃긴데, 이게 막상 카드를 한 번 더 찍을 땐 생각이 안 난다. 돈을 두 배로 내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거다. 그러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겠지. 근데 뭐, 나의 멍청함에 웃음을 터트리는 것에 대한 비용이 일, 이 천 원 정도라면 나쁘지 않은 거다. 딱 그만큼의 금액이니 웃을 수 있는 거 기도 할 거고. 사실 그 외에도 오늘은 한 일도 많고 즐거웠던 것도 많은데, 꼭 하나를 꼽으라면 이 ‘멍청 비용‘이 쓰고 싶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까. 그럼, 내일도 웃는 일이 생기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