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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 Jan 27. 2020

광화문

늦가을이었다. 지난 1년간 가을을 기다려왔다. 1년간 오매불망 기다렸던 가을, 이 녀석과 하루하루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간절히 기다렸건만, 이 녀석은 애석하게도 기다린 사람의 마음은 신경도 안 쓴 채 머물렀던 자리에 채 온기가 돌기도 전에 벌써 자리를 뜨려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겨울이라는 녀석이 올해는 조금 더 일찍 와야된다라나 뭐라나, 그들만의 약속이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내 영역 밖의 일임을 쾌히 인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나 인정과 동시에 찾아오는 나란 존재의 무력함은 그리 반갑지 못했다.

가을이 떠날 때가 다가왔는지 그 날은 평소보다는 조금은 이른 시간에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서울의 도심에 빽빽이 자리한 건물들은 하나둘씩 유리창을 통해 사방으로 빛을 뿜어냈다. 이에 질세라 도로 위의 차들 역시 화려한 조명으로 화음을 쌓아 올렸다. 도심을 가득히 채운 빛들의 향연, 어둠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서울의 아름다운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가을과의 헤어짐이 그리 아쉬웠는데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무심코 고개를 살짝 돌리자 눈 앞으로 광화문이 들어왔다. 오래전부터 굳건히 그리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화문이거늘 그 날 따라 새삼 광화문에 더욱 눈길이 머물렀다. 길지 않은 시간 사이에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 서울에 우두커니 자리 잡고 있는 광화문은 먼 시간을 흘러온 탓에 혼자 동 떨어진 듯했으나 신기하리만큼 괴리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2018년의 서울에서 500년이 훨씬 넘게 지난 조선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내가 서 있는 이 거리, 밟고 있는 이 땅 위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걸음이 닿았었을지, 그리고 그 사람들 중 그 누구 하나도 같지 않다는 사실에 광화문을 바라보고 서 있던 나는 문득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영문(營門)은 알 수 없으나 스쳐 지나간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지금껏 만나왔던 사람들은 기억 저편에 머물고 있었다. 함께했던 시간들은 먼지가 쌓인 채 후미진 구석방에 박혀 있을 뿐이다. 그 누구 찾는 이가 없는데 나라고 굳이 먼지들을 털어 내고 싶지는 않았다. 주변에 남은 이들이 몇 명인지 헤아리는 일은 언제부턴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기계처럼 주변을 사람들로 가득 채웠는데, 뒤를 돌아보니 다 텅 비어 있었다. 그 이후로 담을 쌓기 시작했다.  나의 문제인지 그들의 문제인지 실은 잘 모르겠다. 양자택일의 문제라면 모든 원인을 나한테 돌리는 게 마음은 편하다. 처음은 호기심으로 가득하지만 점차 상대를 알아가며 눈에 들어오는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나는 성숙치 못했다. 옭아매고 있던 관계들을 내려놓으니 한결 가벼웠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지금껏 함께한 광화문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왜 신께서는 이 땅 위의 피조물들을 제각기의 다른 모습으로 창조했을까. 매일매일 마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매번 새로울 뿐이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목소리부터 말투까지, 하물며 10초에 몇 번 눈을 깜빡이는지조차 하나 같이 다른 이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각자의 어딘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는데, 영역 밖의 일을 알기 위해 아등바등한 지난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과거에 복종할 필요는 없으나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게 왜 이리도 힘든지. 아는 데까지만 하자는 외침이 내 영혼 깊숙이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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