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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 Jan 28. 2020

연락에 대한 나의 소신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쏟는다는 것은 비교적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연락의 빈도를 관계의 깊이를 가늠하는 절대적인 척도로 삼는 성급한 오류를 범하지 않는 나는 핸드폰 속 네모난 창안에 갇혀 쉴 새 없이 주고받는 단어와 문장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백 번 카톡을 하는 것보단 뜬금없는 전화 한 통을 더 좋아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주로 텍스트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잘 못 하는 나와 같은 사람은 이게 꽤나 큰 고통이다. 핸드폰은 끊임없이 새로운 소식들을 전한다. 마음 같아서는 그 소식들에 즉각 반응하고 싶지만 하루 종일 연락에만 신경 쓰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어떤 형태의 연락이던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고 싶어 한다. 별생각 없이, 손이 움직이는 대로 상대방에게 보내는 텍스트에는 미처 마음이 담기지 못하는 일이 잦기에 연락하는 데 있어 시간을 두는 편이다. 얼굴을 마주 보며 오가는 대화는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 있기에, 오고 가는 이야기 속에서 상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일상에서의 텍스트 형태의 연락은 그게 잘 안 되더라. 텍스트 속에 많은 것들이 갇히고 감춰지기 때문일까. 차선책으로 고른 전화는 얼굴을 마주 보고 진행되는 대화에 비하여 여전히 부족하지만 나름의 대안을 제시한다. 텍스트 속에 갇혀버리는 많은 것들을 —감정을 숨기지 않는 얼굴의 솔직함, 살짝 과장된 제스처, 그리고 규제화할 수 없는 말투까지 — 소리라는 형태로 그나마 해방시킨다 해야 하나.

연락의 빈도보다는 마음이 중요하지 않을까. 마음의 문을 닫은 상태에서 오고 가는 너와 나의 대화는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을 마구 쏟아 내지만 문 앞을 서성이다 발걸음을 돌리는 일이 잦다.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야기, 두려움, 울타리가 있기에. 이것들은 우리의 관계의 한계이기에. 한계를 뛰어넘는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려 보지만 어쩌면 영화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울타리를 뛰어넘어보고자 갖은 노력을 다해 보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 이상, 울타리 너머는 다른 누군가의 영역일 뿐이다.

핸드폰 화면 안에선 웃고 있지만, 표정은 이미 돌덩이가 되어 버린 모습을 거울을 통해 마주한다. 반복되는 연락의 무의미함에 지쳐가는 중 전화벨이 울려온다.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근황이 조금은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나의 마음이 닿은 것일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 반가운 목소리는 물리적 거리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탁구대 위로 공이 오가듯이 자연스레 오가는 서로의 근황들은 기다린 만큼 반가울 따름이었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나의 진심이 담기고 닿는 데까지 나의 요즘을 전하게 되는 이런 대화는 적어도 둘의 관계가 어떠한 목적이나 무엇을 얻고자 하는 그런 거짓된 관계가 아님을 증명하는 셈이다.

전화를 마치고 이따금 핸드폰이 바쁘게 알리는 소식들을 뒤로한 채 번호를 누른다. 다가오는 주말에 커피나 한잔하자고. 네모난 창으로부터 발을 빼 마주 앉아 못다 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시간이다. 서로의 울타리는 허물고 서로의 영역에 발을 디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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