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
어젯밤은 괴로웠다. 오랜만에 여우굴에 갔었고 거기서 나의 어두운 면이 드러났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나의 내면은 혼돈으로 가득했다. 가면을 잘 쓰고 있어서 다른 여우들은 내가 화나가고 번민에 잠겼는지 눈치를 못 챘을 것이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들도 안 변했다. 나는 안 변했지만 약간 변했다. 예전 같았으면 화를 내고 독하게 쏘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긍정적인 것은 내가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이다. 독한 말을 듣고 더 독한 말로 갚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은 상처를 받았다. 생각해 보니 어떻게 해도 상처는 받았을 것 같다. 그냥 웃으면서 넘어갔다. 나의 자아는 비굴하게 왜 그랬냐고 나를 다그쳤다. 그런데 직감적으로 여기서 바로 화를 쏟아내고 독한 말을 내뱉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우리 사이에 악마가 있었던 것 같다. 유혹이었다. 바로 그때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일단 행동하지 않았다. 비굴은 확실하게 아니었다.
이후 집으로 돌아와서 잠들기 직전까지 번민에 휩싸였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났는데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전날 아무리 심각한 일도 다음날 아침이면 괜찮아졌는데 이번에는 감정이 더 확실하게 안 좋았다. 이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그리고 성당에 가서 새벽 미사를 봤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의 복음은 그 유명한 '서로 사랑하라'였다. 나에게 해를 끼친 원수를 사랑하라니. 심지어 오랜 세월 잘 지낸 여우들 조차 이렇게 미워하게 되는데 원수까지 사랑으로 감싸라니. 너무 가혹한 주님의 말씀이다. 단절하지 말고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라고 하신다. 나는 계속 생각했다. 사실 어제 여우굴의 여우들과 바로 손절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여우들과 단절하지 말고 나를 상처 준 행위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마음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하기로 했다. 단절하지는 않고 거리 두기를 하는 것으로. 자꾸 가까이 두고 접하게 되면 미워하는 마음만 커질 테니 용서와 자비는 둘째치고 일단 멀리 도망가기로 했다. 내 머릿속에 없으면 미워하지 않기에. 나는 아직 쪼랩이다. 쪼랩은 쪼랩에 맞는 수준이 있다. 단절하지 않고 거리 두는 것으로 일단 실행해 본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이후 다시 생각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