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소설 속에는 굉장히 다양한 영미 문학의 흔적이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문체가 참 수려하고 아름다운 이 소설은 사실 고전 영미 문학에서 온 좋은 문장들을 인용하여 더욱 다채로운 문장을 사용하여 영어의 매력을 보여주곤 합니다. 동시에 영미 고전 문학을 인용하여 저자가 의도하는 소설 속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고 특별하게 전달하는 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Anne of Green Gables 두 번째 챕터에서는 총 세 곳에서 특히 유명한 영국 고전 문학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먼저 2장을 시작하고 매튜 아저씨가 마차를 끌고서 기차역으로 가는 장면을 묘사하며 새들이 지저귀는 아름다운 여름날과 같았다며 줄을 구분하고 들여 쓰기를 해서 인용하여 표시한 부분이 등장하는데요.
특히 이런 식으로 인용을 명확하게 표시해 주어 본인이 문장을 다른 곳에서 영감을 받아 가져와서 활용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매우 정직한 글쓰기가 몽고메리 여사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빨강머리 앤을 읽으면서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영미 고전문학의 인용 부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요. 그래서 책을 읽어가며 영미문학과의 연계를 찾아보는 재미가 이 소설 읽기의 또 하나의 별미라 할 수 있습니다.
The little birds sang as if it were
The one day of summer in all the year.
- ANNE OF GREEN GABLES, chap 2.
매튜가 마차를 타고 가는 배경을 묘사하며 등장한 이 인용문은 미국의 시인 제임스 러셀 로웰(James Russell Lowell)이 테니슨의 영향을 받아서 성배를 주제로 1848년에 발표한 장편 서사시 <The Vision of Sir Launfal>의 제1부, Prelude의 4연에 등장하는 문장입니다. 이 시는 발표 이후 큰 인기를 끌고 사랑받았다고 하는데요.
이 장편서사시는 성배를 주제로 하여 작성된 시입니다. 성배를 찾으러 간 기사가 여러 여정 끝에 꿈을 꾸며 진짜 성배는 물건이 아닌, 바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 특히 현실 세계 속에 만나는 주위의 약자를 돌보고 돕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 1부는 바로 기사가 성배를 찾으러 떠나는 배경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성기사가 거룩함 사명과 소명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길의 배경을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몽고메리 여사는 매튜 아저씨가 고아를 데리러 가는 장면에 이 문장을 사용함으로써 매튜 아저씨가 가는 그 길은 마치 성배를 찾으러 기사가 길을 가듯 그런 고귀한 여정이었음을 알리고 싶은 저자만의 숨은 속뜻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매튜 아저씨 본인이 인지하지 못했을지언정 그 길은 마치 성배 기사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자비와 사랑의 거룩한 사명을 발견하는 길이 되었듯이 매튜 아저씨의 앞으로의 만남과 여정이 그리 되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복선이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기차역에 앉아 기다리는 앤을 보면서 역무원이 매튜아저씨에게 앤을 설명하는 장면에서도 유명한 영국 고전 소설의 인용이 등장합니다.
But there was a passenger dropped off for you – a little girl. She’s sitting out there on the shingles. I asked her to go into the ladies’ waiting room, but she informed me gravely that she preferred to stay outside. 'There was more scope for imagination, ' she said. She’s a case, I should say.
따옴표로 표시하여 등장한 'Scope for imagination'이란 이 표현은 영국의 소설가 로랜스 스턴(Laurence Sterne)이 1768년에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여행기 소설 A Sentimental Journey Through France and Italy의 제42장, 파리편의 첫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이 여행기 소설은 당시의 대부분의 여행을 주제로 한 문학이 고전적으로 교육 목적으로 작성된 것과 달리,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느끼는 감수성을 바탕으로 각 나라마다 방문하며 느낀 감정과 욕망을 주제로 작성된 여행 소설입니다. 오히려 현대의 여행기의 그 감수성과 자유로운 감상과도 유사한 소설이라 출간되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후대의 영미 문학과 여행기에 큰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소설 속에서 따온 Scope of imagination이란 문장은 여행하며 마주한 새 장 속의 새를 보며 갑자기 펼쳐진 상상의 세계와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갇혀있고 마치 노예가 된듯한 모든 존재의 삶을 상상하며 슬픔과 고뇌, 각종 상상이 꼬리를 물며 전개되는 순간을 묘사하며 등장한 단어입니다.
이 표현은 기차역에 마치 버려진 듯, 갇혀있는 듯 심란해진 자신의 위기와 상황 속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앤 특유의 성품과 기질을 보여주기에 매우 적합한 단어라 생각됩니다. 현실의 익숙함과 환경의 제약을 넘어 주어진 것 너머의 무언가를 생각하고 상상을 펼치며 꿈꿀 수 있는 것. 마치 새장 속의 새가 아닌 상상의 지평이 열리면 온갖 다양한 환상의 이야기로 이어지듯이, 앞으로 펼쳐질 앤의 이야기, 특히 과거 앤의 이야기들이 그러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곧 소설 속 문장을 따옴으로써, 저자는 앤이란 존재는 굉장히 정체되어 있고 익숙함에 취해있는 이 마을의 분위기 가운데 독특한 감수성과 감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반향을 불러일으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앤이 매튜 아저씨가 오지 않으시면 체리 나무에서 자려로 했다며 이야기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영국 오페라극 가사의 한 구절입니다.
I wouldn't be a bit afraid, and it would be lovely to sleep in a wild cherry-tree all white with bloom in the moonshine, don't you think? You could imagine you were dwelling in marble halls, couldn't you? -ANNE OF GREEN GABLES, CHAPTER 2
이 부분에는 윌리엄 발페( William Balfe)의 유명한 오페라 보헤미안 소녀 < Bohemian Girl>의 가곡 중 하나인 < I dreamt that I dwelt in marble halls>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마치 떠돌이 집시 소녀 같은 순간이지만, 오페라 주인공처럼 그렇게 낭만적으로 상상하며 아름드리나무가 펼쳐진 곳이 마치 대리석 홀인 양 생각하며 밤을 보내려 했다 표현한 부분이었는데요. 역시나 그 순간 앤의 기분과 위기를 상상을 통해 늘 극복해 내는 앤의 성향을 보헤미안 소녀에 빗대어 굉장히 잘 살려낸 선택으로 인용된 표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페라 주인공의 이야기 또한 집시인 줄 알았으나 원래 귀족 신분과 아버지를 찾게 되고, 사랑하는 연인도 만나 결혼하게 되는 해피 앤딩으로 마치듯이, 앤 이야기의 전개에서도 앞으로 오페라처럼 위기를 넘어 이러한 동화 같은 특별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을 예고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앤 이야기 속에는 계속해서 이 시리즈의 마지막이 되는 제8권에 이르기까지 고전 문학과 문화 작품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연계된 고전의 이야기를 발견할 때 저자가 숨겨놓은 이야기 속 전개와 깊은 의미를 더 가까이 마주할 수 있기에 이야기 속 숨은 고전의 비밀들을 찾아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