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투오 <강박>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jYIH34GFRLA
지난 여름 국립 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전시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는 기대와 달리 조금 실망스러운 전시였습니다. 각각의 작품이 전시 주제나 다른 작품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를 보길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중국 작가 왕 투오의 영상 작품 <강박> 때문이었습니다. 영상에 등장하는 오래된 건물이 풍기는 비밀스러운 분위기와 건물과 그 건물을 지은 건축가의 내면을 연결시키는 관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왕 투오는 1950년대 중국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형상화했으나 현재는 거의 버려진 베이징의 푸슈이징 빌딩을 최면술사와 그 빌딩을 지은 건축가의 시점으로 탐험합니다. 건축가는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축가의 내면의 지도가 바로 건축물의 도면임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요. 그는 정신분석학자 칼 융이 직접 설계하여 집을 짓고 자신의 의식이 확장될 때마다 건물을 증축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융의 집은 그의 내면을 3차원으로 구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러 번의 증축을 거친 뒤 융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폐쇄된 장소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명상과 수양을 하며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 말이죠.
건축가 역시 융의 의견에 동의하며 이런 밀실이 있어야 사람은 정신이 온전해지고 건물은 완벽한 건축물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가본 적 없는, 건물의 가장 낮은 곳에 숨겨진 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하며 영상은 마무리됩니다.
영상 속 건축가와 칼 융의 '밀실' 이야기를 들으니 김영하 작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책을 왜 읽어야 하냐'는 질문에 그는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갖기 위해서'라고 답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대부분의 삶은 실패한 채로 끝난다. 그래도 우린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나만의 내면이 있어야 한다. 흔들리지 않을,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내면.'
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필사적으로 책을 읽곤 하는데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김영하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왜 그랬는지 알겠더라구요.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것들이 닿지 못할, 저만의 고유한 영역을 만드는 방법 중의 하나가 독서였던 것 같습니다. 전시회를 가는 것도 방법 중 하나지만 책은 언제 어디서든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가는 것에 비하면 훨씬 간편해서 좋더라구요.
김영하 작가가 말하는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내면'과 왕 투오가 건축가의 입을 빌려 얘기하는 '가장 낮은 곳에 숨겨진 밀실'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왕 투오는 밀실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얘기하고, 김영하 작가는 그 내면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죠.
여러분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여러분만의 공간을 갖고 계신가요? 그 곳을 더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나요? 크고 작은 굴곡으로 가득한 인생이지만 우리 각자의 밀실 안에서 만큼은 평온하고 반듯한 마음으로 편히 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