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작가 <한지와 영주> &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UVjRWc0q7A4
"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다.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 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말이 무서웠다.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오늘 영상은 최은영 작가의 소설 <한지와 영주>에 나오는 글로 시작해보았습니다. 스물 일곱 영주는 프랑스를 여행하다 들른 수도원에서 원래 계획했던 일주일보다 훨씬 긴 일곱달을 보내게 됩니다. 그곳에서 일하고 기도하며 봉사자로 지내던 그녀는 케냐에서 온 한지를 만납니다. 둘은 우연히 같은 조에 배정되어 근무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터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지는데요. 이주 간의 봉사 활동이 끝난 뒤에도 둘은 매일 밤 만나 산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영주는 한지에게 깊은 애정을 느낍니다. 그러던 중 나이로비로 돌아가기 이주 전부터 한지가 영주를 외면하기 시작하고 영주는 왜 한지의 태도가 돌변했는지 영문을 몰라 괴로워하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한지를 떠나보내게 됩니다.
영주는 한지와의 기억을 되돌아 보다가 영상 첫 부분에 읽어드린, 그녀의 할머니가 해준 말을 떠올립니다. 지질학을 전공한 영주는 훗날 남극에 가게 되고 남극의 얼음 속에 그녀가 수도원에서 쓴 일기장을 묻습니다. 한지와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본인한테서 떨어져 얼음에 붙기를 바라는 영주의 태도를 보면 그녀는 한지와의 기억을 영영 잊고 싶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얼음 속에서 영주의 일기장이 적어도 일만 년은 썩지 않을 것이란 점을 생각하면 영주는 한지와의 일을 잊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한지와의 추억이 최대한 오래, 본래 모습 그대로 존재하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타오르는 숯에 더 가까운 것인가요? 영주의 할머니의 말처럼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을 떠나 보내는 일에 우리는 초연해져야 할까요?
영주가 한지를 기억에서 지우려고 하는 것과 달리 예술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는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연인과의 기억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았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무제(로스)>는 그의 연인이 건강했을 때의 체중과 같은 무게의 사탕을 전시장에 쌓아둔 작품입니다. 관람객은 자유롭게 사탕을 가져가거나 먹을 수 있고 관람객이 가져간 무게만큼 사탕은 다시 채워집니다. 사탕을 가져가거나 먹음으로써 관람객은 토레스와 그의 연인간의 사랑, 추억의 일부를 공유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탕처럼 달콤하지만 깨지기 쉽다는 점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또다른 작품 <무제(완벽한 연인들)>은 처음에는 똑같은 시각을 가리키지만 어쩔 수 없는 오차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다른 시각을 가리키는 한 쌍의 시계를 보여줍니다. 두 개의 시계는 서로 사랑하지만 결국엔 각자의 시간을 살 수 밖에 없는 연인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데요.
아무리 사랑해도 각자의 시간을 살 수 밖에 없는 게 인생이라면 점점 더 벌어지는 시간의 차를 메울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 무언가가 다른 사람들과 쌓은 추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무서워 현생의 기억을 떨쳐내며 살기 보다는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 기억 때문에 맘껏 울고 웃으며 살고 싶습니다. 우리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니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기억 뿐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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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