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 작가 <겹겹의 시간> & 앙드레 지드 <새로운 양식>
* 아래 유튜브 영상의 스트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지상의 양식」은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지드가 1893년 아프리카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자유, 젊음, 죽음, 행복 등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시, 일기, 대화 등 다양한 형식으로 풀어 쓴 책입니다. 읽으면서 책 전체에 다 밑줄을 쳐야 되나 했을 정도로 인상적인 구절로 가득한 책이었는데요. 민음사에서 출간된 책에는 「지상의 양식」의 후속 작품인 「새로운 양식」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이번 영상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장은 「새로운 양식」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먼저 발췌한 내용을 읽어 드릴게요.
'슬픔이여, 그대가 나를 꿇게 하지는 못한다! 나는 비탄과 흐느낌 사이로 들려오는 그윽한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내가 마음대로 가사를 지은 노래, 약해지려 하는 마음을 굳게 다잡아주는 그 노래. 동지여, 나는 그 노래를 그대의 이름으로 가득 채우고 굳센 마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부름으로 가득 채운다. (중략)
그대의 발길이 가는 그곳으로, 그대의 희망이 부르는 대로 전진하라. 과거의 그 어떤 사랑에도 매이지 말라. 미래를 향하여 몸을 던져라. 더 이상 시를 꿈의 영토 속으로 옮겨 놓지 말라. 현실 속에서 시를 읽어내어라. 시가 아직 현실 속에 있지 않거든 그 속에 시를 심어라.'
앙드레 지드는 슬픔에 지지 말고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굳세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얼마 전 한 전시를 보고 그곳의 작품들이 앙드레 지드가 이야기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굳게 다잡아주는 노래’ ‘꿈이 아닌 현실 속에 심는 시’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시는 서울 용산의 갤러리 드로잉룸에서 열린 김미경 작가의 개인전 <겹겹의 시간>이었는데요.
김미경 작가는 유학 생활로 인해 여전히 척박하게 느껴지는 도시 서울에서 썩 좋지만은 않은 작업 환경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밝은 회색이나 하늘색을 바탕으로 해서 전반적으로 밝고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는데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밝은 색 아래로 가려져 있던 어둡고 짙은 색이 언뜻 언뜻 보입니다. 이는 작가가 짙은 색으로 채색을 시작해 점점 더 밝은 색으로 그 위를 덧칠했기 때문인데요. 섞으면 섞을수록 검정에 가까워지는 물감의 속성에 저항하며 짙게 색칠한 캔버스 위를 점점 더 밝은 색으로 한 겹 한 겹 칠해 나가는 작가의 모습에서 현실의 슬픔이나 어려움에 지지 않고 의지와 희망으로 그것을 담담히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앞서 들려드린 지드의 문장을 보면 전반적인 내용은 이해가 되지만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아주는 노래'나 '꿈이 아닌 현실 속에 심는 시'라는 개념은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졌는데요. 김미경 작가의 그림을 마주하니 그것들이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수행에 가까운 작업 방식은 작가에게 '약해지려는 마음을 굳게 다잡아주는 노래'이자 '꿈이 아닌 현실 속에 심는 시' 였을 것이고, 수행의 결과물인 그의 그림은 그들의 존재를 믿고 앞으로 나아간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요.
우리의 인생은 도처에 슬픔과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아주는 노래'와 '꿈이 아닌 현실 속에 심는 시'의 힘을 빌려 현실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요. 이 ‘노래’와 ’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들의 존재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태도일 겁니다. 우리의 의지가 약해질 때나 확신이 흔들릴 때는 김미경 작가의 그림과 앙드레 지드의 책을 펼쳐 보는 건 어떨까요? 그들의 글과 그림에서 제가 발견한 것과는 또다른, 여러분만의 새로운 ‘노래’와 ’시’를 찾게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