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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사랑한미술관 Nov 24. 2020

예술가가 사전을 만든다면

올라퍼 엘리아슨 & 류시화 시인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fanZp7b39GE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오늘은 시 한 편을 먼저 들려 드리겠습니다.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 류시화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 간 하루들의 재로

광부는 땅속에 묻힌 별을 찾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류시화 시인은 시인이 사전을 만든다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단어들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시에 나온 단어 중 몇 개를 실제 사전 속 정의와 비교해볼까요?


다음 사전에서 '죽음'이란 단어는 '생물의 목숨이 끊어지는 일'로 정의되고 '봄'은 '사계절의 하나. 보통 양력으로 3~5월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며, 음력으로는 절기상 입춘에서 입하 전까지의 동안을 말한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에 반해 류시화 시인은 '죽음'을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시인의 시선에서 보면 '죽음'이 꼭 모든 것이 끝나는, 무서운 존재가 아닐 수도 있고 '봄'은 만물이 새로 태어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릴 떠났던 존재들과 재회하는 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위안을 얻게 되는데요.


그렇다면 예술가가 사전을 만든다면 단어들은 얼마나 다른 정의를 갖게 될까요? 올라퍼 엘리아슨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인데, 올라퍼 엘리아슨이 사전을 만든다면 우리가 아는 단어들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질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올라퍼 엘리아슨은 덴마크 출신의 예술가로, 2003년 런던 테이트 모던의 터빈홀에 인공 태양을 설치한 <The Weather Project(날씨 프로젝트)>로 더 유명해진 작가입니다. 자연 현상을 소재로 조각부터 건축까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요.  


그의 초창기 작업 중 하나인 <Yellow Corridor(노란 복도)>는 여러 미술관과 궁전의 내부 공간을 단색광으로 비춘 설치 작업입니다. 엘리아슨은 우연히 모든 색을 없애 버리는 단색광을 발견하고 이 빛을 작업에 활용했습니다. 관람객들은 이 공간 안에서 작품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모든 색이 고유의 색을 잃어버린 낯선 광경을 마주하게 되고, 자신의 손을 비롯해 평소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것들을 특별한 시선으로 평소보다 오래 관찰하게 됩니다. 엘리아슨은 이 작업을 통해 어떤 빛을 비추느냐에 따라 대상의 색이 바뀌는 것처럼 같은 대상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평소와는 다른 것을 볼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이 작품은 지난 2016년 리움 미술관에서 열린 올라퍼 엘리아슨의 개인전 <세상의 모든 가능성>에 소개되었던 <Rainbow Assembly(무지개 집합)>입니다. 어두운 공간에 커튼처럼 위에서부터 미스트가 뿌려지고 물방울에 빛이 굴절되어 무지개가 만들어집니다. 무지개는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 나타나거나 사라지고 한 관람객이 보고 있는 무지개를 다른 관람객은 볼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무지개는 오직 지금 이 순간 나만 볼 수 있는 무지개인 것이죠.  


올라퍼 엘리아슨은 기후 변화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서 이와 관련한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Ice Watch(얼음 시계)>는 그린란드에서 채취한 빙하를 코펜하겐, 파리, 런던 등 대도시 한복판에 두고 오고 가는 시민들이 빙하가 녹는 과정을 볼 수 있게 한 작업입니다. 시민들은 빙하를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빙하를 만지고 빙하가 녹으면서 기포가 터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기후 변화가 우리와는 동떨어진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올라퍼 엘리아슨은 자연을 소재로 활용해 부연 설명 없이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술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품을 통해 그는 그 무엇도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시선으로 무엇을 볼 것인지는 관람객인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일 올라퍼 엘리아슨이 사전을 만든다면 '색'은 '사라짐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무지개'는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증거'로, '빙하'는 '우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로, '자연'은 '통역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모두의 모국어'로 설명하지 않을까요?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올라퍼 엘리아슨이 이야기했듯이, 말이나 단어의 의미도 누가 어떤 생각과 시선을 가지고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이나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각자의 생각과 시선을 담은 자기만의 사전이 있을텐데요. 이번 영상이 여러분의 사전 속 단어들과 그것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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