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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사랑한미술관 Nov 30. 2020

좋은 그림이란, 온기를 자아내는 그림

장 자크 상페 &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IKhRyBx_S58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좋아합니다. 성격이나 성향이 저와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그의 글을 읽다가 저와 닮은 모습을 발견할 때면 웃음이 나곤 하는데요. 하루키 에세이집은 꽤 여러 권이 나와있는데 그중 제가 재밌게 읽은 책은 2권입니다. 하나는 3년간 유럽에서 지낸 이야기를 담은 여행기 「먼 북소리」와 다른 하나는 미발표 에세이와 단편 소설부터 수상 소감까지 다양한 종류의 글을 모은 책 「잡문집」인데요. 「잡문집」에는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루키의 생각을 담은, '온기를 자아내는 소설을'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20대 초반, 하루키는 빚을 많이 져서 난로 한대 없이 몹시 추운 집에 살았다고 하는데요. 부부가 키우던 고양이 두 마리뿐만 아니라 길고양이까지 집에 들여 같이 자던 밤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살아가기에는 고달픈 나날이었지만, 그때 인간과 고양이들이 애써 자아내던 독특한 온기는 지금도 종종 생각난다.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캄캄하고 밖에서는 초겨울 찬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는 밤에 다 함께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소설.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소설, 어디까지가 제 온기고 어디부터가 다른 누군가의 온기인지 구별할 수 없는 소설. 어디까지가 자기의 꿈이고 어디부터가 다른 누군가의 꿈인지 경계를 잃어버리게 되는 소설. 그런 소설이 나에게는 '좋은 소설'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밖의 기준은 내게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하루키의 답과 그런 답을 떠올리게 한 기억이 너무 따뜻하지 않나요? 이 글을 읽은 뒤로 저는 잊을 만하면 한번씩 추운 겨울 젊은 부부와 고양이들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잠이 든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고 하루키가 이야기하는 '좋은 소설'의 기준이란 것이 소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 그림 등 모든 예술 장르에 적용시킬 수 있는 기준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기준을 그림에 적용시켜 보았을 때 좋은 그림이란 '온기를 자아내는 그림'이 될 텐데요. 제가 아는 작가 중에 이 기준에 가장 잘 부합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프랑스의 화가 장 자크 상페인 것 같습니다. 장 자크 상페는 국내에서는 책 「꼬마 니콜라」 시리즈의 삽화가와 「얼굴 빨개지는 아이」,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의 저자로 유명해졌는데요. 저도 초등학생 때 「꼬마 니콜라」 시리즈를 통해 처음 그의 그림을 접했는데 어른이 된 지금까지 이렇게 오래 그의 그림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답니다.


이건 2016년 홍대의 상상마당 갤러리에서 열렸던 장 자크 상페의 개인전 <장 자끄 상뻬: 파리에서 뉴욕까지>에서 구입한 상페의 엽서집인데요. 여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는 뉴욕, 하나는 파리를 배경으로 한 그림을 담은 엽서집입니다. 저도 지난 4년동안 애지중지하며 보관만 해왔던 엽서들이라 이번에 처음으로 안에 어떤 그림들이 있는지 보게 되었는데요.


먼저 뉴욕 엽서집을 같이 보시면 여기는 아직 건물의 불이 다 켜지지 않은 새벽녘 요리사처럼 보이는 남자가 식료품을 한가득 싣고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는 모습을 그리기도 하고, 간밤에 눈이 엄청 많이 내려서 어른들은 눈을 치우거나 스쿨버스를 정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와중에 아이들은 눈덩이를 굴리며 해맑게 등교하는 모습을 그리기도 합니다. 이 그림에서는 함박 눈이 펄펄 날리고 지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거리 한가운데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공간이 보이는데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아노, 색소폰 같은 악기들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안에는 그들의 연주를 들으러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이 그림은 상페의 그림 중에서도 특히 따뜻한 온기가 잘 느껴지는 그림인 것 같습니다.


다음은 파리를 배경으로 한 엽서집을 같이 보시면, 여기엔 다리를 건너는 중년 남성과 강아지가 그려져 있고, 다른 엽서에는 다리 밑 강가에서 자전거를 옆에 두고 풍경을 바라보는 남성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상페는 이렇게 현대인들의 고독, 외로움을 그림의 소재로 자주 다뤘는데요. 하지만 상페가 다루는 이 외로움과 고독은 쓸쓸하거나 우울하거나 슬픈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만 우울하고 너만 쓸쓸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때때로 혹은 자주 외로움을 느낀다고 얘기해주는 것 같아 위안이 되더라구요. 다음은 두 엽서집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그림이었는데요. 이 그림의 배경은 아마 놀이공원인 것 같구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타거나 스케이트를 타며 정신없이 밖에서 놀고 있는데 딱 한 아이만 인형극을 보기 위해 맨 첫 줄 가운데에 앉아있어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찬 아이의 시선을 보면 저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기다려본 적이 언제였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잊고 있던 기대, 설렘 같은 감정들을 다시 떠올려 보게 하는 그림이었습니다.   


이렇게 상페의 그림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상페의 따뜻한 시선과 함께 담겨 있어서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까지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상페의 그림 속 온기가 여러분께도 고스란히 전달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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