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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사랑한미술관 Sep 14. 2020

아주 가끔은 내게 아무런 삶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아서

허명욱 작가 개인전 @가나아트센터



허명욱 작가는 캔버스 위에 옻칠을 반복하는 작업 방식을 통해 캔버스 위에 축적된 시간의 무게와 반복된 행위들을 가늠하게 한다. 지난 초여름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온통 파란색에, 작은 격자 무늬로 요철이 있어 보는 각도에 따라 표면이 반짝이는 작품(Untitled, 2020, Ottchil on fabric, 250x250cm)이었다. 커다란 캔버스를 가득 채운 시원한 파란색이 파도가 부서지면서 햇살에 반짝이는, 하늘에서 내려다본 바다를 떠올리게 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산문시집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에서 '대지와는 달리 바다는 인간들의 노동과 삶의 흔적들을 지니지 않'으며 '이로 인해 지상의 사물들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바다의 엄청난 순수성이 생겨난다. (중략) 바다가 우리의 상상력을 새롭게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바다는 인간의 마음처럼 무한하지만 무력한 열망이고, 끊임없이 추락하는 도약이며, 달콤한 한탄이기에 우리를 흥겹게 한다. 바다는 음악처럼 매혹적이다. 인간의 말과는 달리 음악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지만, 우리네 마음의 움직임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정은 영혼의 움직임이라는 파도와 함께 솟아 올랐다가 급격히 떨어지고는 하는데, 바다와의 내밀한 조화 속에서 위로를 받으며 자기 자신의 실패의 슬픔을 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여러 겹의 시간과 반복된 행위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는 캔버스를 바라보며 나는 그 어떤 흔적도 쌓이지 않는 바다를 떠올렸다. 무언가가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작품이 결국엔 그 무엇도 쌓이지 않는 것을 떠올리게 했다.


나 또한 내가 살아온 시간, 만난 사람들, 내뱉은 말과 행동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존재지만 허명욱 작가의 작품이 내게 바다를 보여주듯이, 아주 가끔은 내게 아무런 삶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아서 그런 나를 보며 당신이 삶을 잊고, 위로 받고, 당신의 슬픔을 잊기를 소망한다. 아주 가끔이라도 내가 당신에게 바다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그런 당신을 보며 삶을 잊고, 위로 받고, 나의 슬픔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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