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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사랑한미술관 Sep 14. 2020

당신의 진짜, 단 하나의 얼굴은 무엇인가요?

돈선필 작가 <포트레이트 피스트> & 안희연 시인 <스페어>

* 아래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이 궁금하신 분은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ngK0kt9yhm0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오늘은 영상 작품을 먼저 보여 드리겠습니다.


누군가를 떠올려보자 그리운 친구 사랑하는 연인 닮고 싶은 사람

누군가를 기억해보자 무엇이 떠오르는가

가장 먼저 내가 떠오른다

우연이 아니다 필연처럼 강력하게 나를 떠올린다

사랑하는 이를 그려보자

손도 발도 몸도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내가 그려진다

나는 이목구비의 집합체가 아니다 나는 신체의 일부가 아니다

항상 그 무언가를 대신하는 위치에 서 있다  


여기서 '나' 즉, 화자는 누구일까요? 예상하셨듯이 '얼굴'입니다.

이 영상은 돈선필 작가의 <자기소개>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접하게 된 건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포트레이트 피스트(Portrait Fist)>에서 였는데요. 이 전시에서 작가는 '얼굴'이라는 이미지가 신체의 일부 그 이상으로, 항상 무언가를 대신해왔다는 점에 주목하며, 우리가 '얼굴'의 이미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소비하는지 탐구했습니다.


영상 작품 <자기소개>는 '얼굴'이 자기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영상에서 ’얼굴’은 자신을 반사시켜 보는 매개체 중 하나로 유튜브를 언급합니다. 요즘 유튜브 속 캐릭터, 특히 게임 캐릭터의 얼굴은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모공과 솜털까지 생생하게 묘사되는데 ’얼굴’은 유튜브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에게 코와 입술, 치아가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저해상도 시대에는 픽셀로 뭉개지거나 생략되었던, 세부적인 것들을 고해상도 시대에 발견하게 된 것이죠.  


이러한 변화에 대해 작가는 얼굴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고해상도의 재현력을 얻으면서 네모난 픽셀의 추상력을 잃었다.' 저해상도 시대 네모들은 모호하고 선명하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반면 모공과 솜털까지 그려내는 고해상도 시대에는 모든 것이 정교하고 촘촘해서 해석의 여지나 빈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강박은 상상이나 추상을 통해 보이지 않는 부분을 유추하려는 시도를 차단합니다. 그래서 얼굴은 자기 소개의 마지막을, 보이지 않는 나머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아무리 선명한 거울에도 비쳐지지 않는

반사할 수 없는 반영하지 못할 나에 관한 이야기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 같지만 모든 것을 이야기한 자기소개의 시간이다

이야기의 공백 이야기의 여집합

지금까지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해온 이야기의 여백을 떠올려 보자  


얼마전 출간된 안희연 시인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에는 <스페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가 돈선필 작가의 <자기소개>와 비슷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먼저 시 전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진짜라는 말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아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 같은 것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 같은 건 없다

식탁 위에는 싹이 난 감자 한봉지가 놓여 있을 뿐


저 감자는 정확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싹이 아니라 독이지만

저것도 성장은 성장이라고


초록 앞에선 겸허히 두 손을 모으게 된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바라본다


하지만 싹은 쉽게 도려내지는 것

먹구름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흐린 것은 흐리고


도려낸 자리엔 새살이 돋는 것이 아니라

도려낸 모양 그대로의 감자가 남는다


아직일 수도 결국일 수도 있다

숨겨 놓은 조커일 수도

이미 잊힌 카드일 수도 있다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로

오늘을 살아간다


여전히 내 안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내가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내가


감자의 초록색 싹은 새로운 생명, 또다른 성장을 의미하지만 독을 품고 있기 때문에 도려내야 하는 존재입니다. 싹을 도려내면 새살이 돋는 것이 아니라 도려낸 모양 그대로의 감자가 남는데, 그 모습을 보며 화자는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나를 떠올립니다.  


진짜,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가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 같다던 시의 첫 행 기억하시나요? 안희연 시인은 단 하나의, 진짜 내가 되기 위해 또다른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모두 차단당한, 싹을 도려낸 감자 같은 우리의 모습을 시에 담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유튜브 속 정교한 캐릭터의 얼굴에서 상상이나 추상의 가능성이 모두 배제되었듯이 싹을 도려낸 감자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생명, 또다른 성장의 가능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캐릭터의 진짜 얼굴은 우리의 추상이나 상상 속에서 더 풍부하고 선명해질 수 있고, 숨겨져 있던 우리의 진짜 모습은 새롭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선명하고 확실한 ‘진짜, 단 하나의 무언가’만을 좇기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고 모호하지만 오히려 더 진짜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 되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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