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France
파리가 위험하다. 마레지구는 위험하니 여자 혼자는 다니지 말라던가, 몽마르뜨 언덕에서 팔찌를 강제로 채우는 흑인들을 조심하라던가, 어린 소매치기들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는 전부터 있긴 했다. 허나 지금은, 한국인들이 탄 단체관광버스에 흉기를 든 강도가 올라타 여권이고 현금이고 전부 훔쳐 달아나는 무서운 뉴스마저 나오고야 말았다.
요즘의 흉흉한 뉴스와는 달리 일 년 반 전에 갔던 파리는 매우 평화로웠다. 햇살 좋은 9월이었고 Maison & Objet 전시 기간이었다. 물론 출장이었지만 전시를 하루 종일 하는 것은 아니고, 감사하게도 해가 길었다. 그래서 맑은 날 걷고 싶은 거리를 걸을 수 있었다.
첫 에어비앤비였다. 사진만 믿고 갔다가 낭패를 봤다는 사람들도 많고, 날짜를 며칠 남기지 않고 일방적인 취소로 난감했다는 사람들도 많은 에어비앤비. 하지만 호텔에서 묵는 것보다 더 좋았다는 사람들, 다른 도시에 집이 하나 생긴 기분이라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기분 좋은 후기들을 믿고 마레지구에 집을 구했다.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고,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이 정감이 가는 집. 좁은 골목길임에도 불구하고 햇살이 잘 드는 집. 반겨준 호스트는 프렌치 시크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외모에 매우 상냥한 남자애였다. 친구 말론 파리지앵들이 도도하다던데 어찌나 호들갑스럽던지, 기분이 좋았다.
하늘이 굉장히 맑았다. 게다가 해도 길고 약간 건조하기까지 해서 내가 딱 좋아하는 날씨였다. 순수한 여행이 아닌 출장 목적이었기 때문에 작은 시간을 잘 쪼개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피곤하니 집에서 쉬자-라고 하기엔 일찍 도착했다. 쁘렝땅 백화점을 둘러보다 보니 양 손 가득해진 쇼핑백 때문에 다시 집에 들러 짐을 놓고 또 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던 것 같다. 항상 드는 생각인데, 여행 가서 망설였던 것들은 전부 사는 게 맞는 것 같다. 괜히 샀다고 후회한 적은 없고 항상 사지 않은 것을 후회하니까. 한국에서 절대 살 수 없는 가격으로 파는 것들은 , 나중에 조금이라도 아쉬워질 것들은 꼭 사야 한다.
에펠탑이 보이기 시작하자 여기가 진짜 파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파리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던 편도 아니고, 어디 유명한 도시에 가서 관광 스폿을 꼭 찍어야 하는 편도 아니지만. 에펠탑은 한 번쯤 보고 싶었다.
여행은 맛있는 식당에서의 식사와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의 커피가 8할이다. 음식만 맛있어도 그 동네 참 좋았다고 기억되니까 말이다. 파리를 다녀온 사람들 중 몇몇이 추천한 카페 콩스탕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백화점과 몽쥬 약국 쇼핑에 지칠 대로 지쳤으니 배가 많이 고팠다.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진짜 맛집을 찾아가는 것을 제일로 치긴 하지만, 한국 블로거들이 많이 포스팅한 맛집을 가서 후회한 적도 없다. 물론 한국인들을 마주쳐 여행의 느낌이 살짝 풀이 죽을 때도 있긴 하다. 메뉴를 정하고 가지는 않아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혼자 여행 온 것으로 보이는 여성분이 말을 걸어줬다. 자기가 먹고 있는 것이 괜찮다며 추천해주고, 물을 따로 주문해야 하는데 보틀이 많이 크다며 셰어 하자고 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마일리 사이러스의 어린 시절을 닮았고 리액션이 정말 귀여웠다. 여성분이라고 하기엔 여자 아이의 강했고, 이 여자 아이 덕분에 식사도 더 즐거웠다.
왜 모파상은 에펠탑을 흉물이라고 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왜 멋있다면서 왠지 좀 무섭다고 할까. 실제로 보니 이제 알 것 같았다. 경이로울 정도의 커다란 키와 촘촘히 짜인 프레임들. 빨리 가까이 다가가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싶은 마음에 에펠탑을 배경으로 한 인증숏 하나 제대로 찍지를 못했다. 뒤늦게 아쉬운 부분.
사진을 찍긴 찍었는데 에펠탑을 바라본 채로 전혀 나오지 않게 찍었다. 샹젤리제 거리로 향하던 찰나, 나중에 와서 또 찍지 뭐 라는 생각도 있었다. 정말 완벽한 하늘이었다. 반팔 니트가 덥게 느껴질 정도로 뜨거운 햇살과 기분 좋게 건조한 공기. 나중에 다시 갔을 때 이런 느낌을 받으려면 겨울은 안 되겠다.
조금 더 여유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면 쇼핑 자제하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고, 쓸 수 있는 돈이 여유가 있었으면 쇼핑할 시간이 부족한 게 두고두고 한이 되었으리라.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Maison & Objet를 참관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을 반에 반에 반으로 쪼개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클래식하다 못해 낡은 느낌마저 드는 에르메스 매장은 히잡을 두른 여자들로 가득했다. 마치 명동 면세점 샤넬 매장에 중국 사람들이 가득 찬 것처럼. 백을 양쪽 어깨에 가득 들쳐맨 중국 여인들 못지않게, 에르메스 매장의 이 여인들은 큰 사이즈의 스카프를 팔에 대여섯 장씩 걸치고 있었다. 궁금했던 향수 시향을 한 후에, 약속한 뱅글을 성공적으로 구매했다. 그리고 또 걷기.
눈길을 사로잡는 곳은 참 많았는데 그저 부족한 시간이 아쉬웠다. 파리도 여느 유럽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술을 함께 파는 식당이나 펍을 제외하고는 일찍 문을 닫는다. 밤이 깊어질수록 휘황찬란해지는 도시는 서울, 도쿄, 홍콩 포함하여 대부분이 아시아 국가에 있다. 그래서 서양인들이 떠올리는 아시아의 이미지에 강한 네온사인이 있다는 것인가 보다. 옷가게든 마트든 일찍 문을 닫으면 물론 아쉬운 점이 있지만, 저녁 시간을 더 여유롭게 집에서 보내게 된다는 이점이 있다. 예전에 브리즈번에서 지낼 때가 문득 그리워진다. 6시 반이면 퀸스트리트의 모든 상점이 문들 닫고 몇몇 식당만 불이 들어와 있었는데. 8시 직전에 울월스나 타깃에 가면 과일도 빵도 싸게 살 수가 있었는데. 그곳엔 언제쯤 다시 갈 수 있을까.
쇼핑다운 쇼핑을 첫날 다 끝내버렸더니, 짐 싸는 것이 고민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떠나는 날까지 건드리지 못했다. 선물로 구입한 것들은 쇼핑백도 살려야 하니 정말 전략적으로 짐을 싼 것 같다. 이제 흐린 날의 몽마르뜨 언덕과 찬 바람 맞으며 탔던 바토무슈, 그리고 한없이 좋았던 마레지구 이야기를 위한 사진을 골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