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France
마지막 날 일정은 꿀이었다. 멀리 출장을 가서 전시회만 달랑 보면 바보짓. 낯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얻는 것이 더 많을 수 있다. 감사하게도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은 마레지구를 돌아볼 수 있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숙소를 마레지구에 잡아놓았는데도 지하철 타러 가는 길목만 왔다 갔다 했었기 때문에, 마지막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지역마다 도시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디자인 관련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기간 동안은, 마치 도시 전체가 전시장 같은 느낌을 풍기기도 한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그 도시의 백화점이나 마트, 다양한 생활용품을 파는 샵은 꼭 들려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아침 일찍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아인트호벤의 그녀, SJ의 파리 마레 방문. 밤 버스를 타고 와서 피곤한 상태였을 테니 우선 든든하게 아침식사부터 했다. 짧은 일정인데도 흔쾌히 들러주어서 감사.
입도 떼기 전부터 아쉬운 점이 보인다. 렌조 피아노(Renzo Piano)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축가 중 한 명인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퐁피두 센터를 겉에서만 둘러보았다니.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을 안 열기도 하였지만 날씨 또한 너무 아쉬웠다. SJ가 꼭 내부 들어가서 전시도 봐야 한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이 파리는 꼭 다시 방문하는 걸로.
파리도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미술관은 10시쯤 문을 연다. 상점들도 마찬가지, 더 늦으면 늦었다. 그래서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돌아다니는 우리는 온통 문을 닫은 거리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발이 작은 우리는 퐁피두 센터 근처의 닥터마틴에서 아동화를 하나씩 지를 뻔했는데, 사 왔어도 충분히 잘 신었겠다 싶다.
그렇게 긴 일정도 아니었는데 내가 머물던 때의 파리는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다. 파리 이전에 밀라노에서는 너무 더워서 옷을 사 입을 정도였고, 파리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제법 여름 같아서 반팔을 섞어 입었건만.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다가올수록 있는 옷을 다 겹쳐 입을 날씨가 되었다. 자연스레 뜨거운 커피를 찾게 되고, 만만한 스타벅스의 직원은 내 이름을 Aro라고 적어주었다. 예전에 Atom이라고 적어준 사람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양반이다.
언젠가 다시 오겠다며 퐁피두 센터를 떠났다.
핀에어에서 조금 이른 여름휴가 항공 예약을 해두어서 종종 이벤트 메일이 오곤 하는데, 봄 여행 가라며 유럽 편 항공이 엄청 싸다며 자꾸 유혹한다. 올해 상반기 비행기 탈 일이 많으니 제대로 읽지도 않고 삭제해버리지만, 여름휴가 다녀오고 한창 지칠 때 즈음 이런 메일이 와버리면 생각이 많아질지도 모를 일이다.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혔다. 아침에도 조금 더 맑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보다 쨍한 햇살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컸다. 금세 배가 고파졌고 괜찮아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위 사진은 파리에서 찍은 사진들 중 내가 손에 꼽는 좋아하는 사진이다. 좋은 날씨에 멋진 거리에 누군지는 모르지만 멋진 사람들이 더해졌다. 역시 난 내 사진을 찍기보다 풍경이나 음식 사진이나 다른 사람 사진을 찍는 것이 더 좋다.
마음에 드는 브런치 집 전경을 찍다가 카메라와 아이 컨텍하는 사람을 발견한다던가, 친구들과 찍은 사진 저기 뒤쪽에서 브이를 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한다던가, 자기 얼굴이 혹시나 나올까 봐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람을 발견한다던가. 우연찮게 찍힌 타인 모습이 그 사진을 더 마음에 들게 하는 경우가 꽤 많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들 자기 입맛에 맞춰 다른 메뉴를 주문했다. 사실 마레 쪽 맛집 같은 것은 미리 알아놓지를 않아서, 그냥 발길 닿는 곳에서 식사를 했던 것 같다. 마지막 날 브런치도 마찬가지. 거기도 정말 좋았다. 파리에서 먹었던 샐러드들 중에 엄청나게 맛있고 인상 깊었던 것은 없었다. 뭔가 덜 신선하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햄버거나 샌드위치에 들어간 야채들은 아삭하고 식감이 좋았는데 샐러드는 그런 신선함이 조금 부족한 느낌. 하지만 감자튀김이 그 부족함을 채우고도 넘친다. 물론 햄버거와 토스트도 항상 중간 이상은 갔다. 날씨가 맑아서 그런지 레몬 띄운 흔하디 흔한 콜라도 더 맛있는 느낌.
즐거운 수다는 잠시, 더 많이 걸어야 했다. 내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하니,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걷고 싶은 기분이었다.
처음 에어비앤비 숙소를 마레지구에 구하겠다고 했을 때, 거기가 좋긴 하지만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서 그려진 마레지구는 볼 것도 많지만 위험한 것도 많은 약간 지저분한 동네였는데 생각보다 깨끗하고 잔잔했다. 위험한 순간도 위험해 보이는 것도 전혀 없었다. 최근 파리 치안이 더 안 좋아졌다고 하니 지금은 또 모르지만. 크림색 건물이 유독 많았고 번쩍거리는 네온사인 따위 없이 정갈한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간판이 주를 이루었다. 혼자 잘났다며 튀는 구석이 없어서인지 전체적으로 눈이 편한 동네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중간중간 이끌리는 상점을 들려가며 마레지구에서 꼭 들려야 할 곳으로 꼽히는 메르시 매장으로 향했다.
번화가보다 주택가에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Merci는 주기적으로 매장 콘셉트가 바뀌는데 빨간색 피아트 500은 항상 입구를 지키고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익히 봐왔던 풍경.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급할 것도 없는데 급한 마음에 단번에 매장으로 들어섰다.
처음 슈퍼마켓에 들어간 어린애처럼, 신나서 계속 돌아다녔다. 하나하나 집중해서 살펴보기엔 눈길을 끄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주기적으로 콘셉트를 바꾸고 그에 맞게 디스플레이를 바꾼다고 하는데, 지금은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지금 사진을 보니 아인트호벤의 Piet Hein Eek 작업실이 생각난다. 그곳도 정말 좋았는데.
Piet Hein Eek(피트 하인 이크) 작업실 방문기
짐에 대한 걱정만 적었으면 뭔가를 더 사 왔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남지만, 그래도 몇몇 사무용품과 컵 세트를 하나 구입했다. 선물용으로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것들도 많으니 한 번쯤은 꼭 들리라고 추천할 만한 곳임이 분명하다.
마레 거리를 걸으면서 인상 깊었던 점 하나. 간판이 없는 곳이 꽤 많았다. 최근 서울 시내에 생기는 카페를 보면 아주 작게 카페 이름이 걸려있는 곳들이 있는데, 번쩍번쩍 나 좀 봐주세요 하지 않아도 자신 있어 보여서 더 마음이 끌린다. 명동이나 강남역 같은 곳들은 화려하고 복잡한 네온사인과 LED 불빛도 매력적이지만, 좀 더 폭이 좁은 번화가는 조용하게 멋 부리는 곳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마레 거리를 걸으면서 내일이면 간다는 아쉬움에 탄식을 몇 번이나 내뱉었는지 모르겠다. 아 내일 간다, 가기 싫다- 무한 반복. 해외출장을 다녀오면 여행 가는 것 같고 좋았겠다는 소리를 듣지만, 실상 여행병만 더 도져서 오곤 한다. 보름 후면 또 이런 상황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