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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철현 Oct 13. 2023

그르륵갉을 아시나요?

편의점 파라솔 아래 아라비안 나이트

"오빠, 그르륵갉 알아?"

식후 그릇들과 설거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나에게 아내가 물었다.

"그릇.. 뭔 각? 설거지 좀 똑바로 해. 콱! 이런 뜻인가?(도저히 알 턱이 없어 그냥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각도 아니고 콱도 아니고 갉이야. 리을, 기역."

"갉? 그게 뭔데? 한국말이야?"

"으이구~ 편의점 회사 다니면서 그것도 몰라? 편의점 관련된 신조어야. 공부 좀 해."

아내는 스스로 학습법을 중시하는 냉랭대학교수처럼 제만 내놓고  알려주지 않았고 편의점 회사를 다니면서 그것도 모르는 무식한 나는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냉큼 인터넷을 뒤졌다. 그르륵갉? 도대체 뭐길래 설거지 하는 나의 콧털을 건드린 것이냐?! 공포 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문구 같기도 하고 길거리 아저씨들이 가래침을 뱉을 때 내는 소리 같기도 한데 이게 편의점이랑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지? 난생처음 들어보는 그르륵갉이란 외계어는 입안에서 굴러가는 까끌까끌한 소리 만큼이나 호기심이 증폭된 나의 전두엽을 간지럽혔다.


어디 보자~ 잘파세대 트렌드 사전에 따르면, '그르륵갉'은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를 끌 때 나는 소리를 일컫는 용어라고 한다. 풉~ 비슷하긴 하네. 이런 말이 있는지 미처 몰랐다. 편의점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는 지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근데 최초의 창작자는 대체 이걸 어디다 써먹으려고 굳이 발음도 어려운 의성어로 표현한 걸까? 좀 더 찾아보니 그 안에 담긴 속뜻은 편의점 테이블 의자에 앉아 속 깊은(때론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걸 의미한단다. 용법은 누군가와 진지하고 내밀한 얘기를 나누고자 할 때 '우리 조금 이따 그르륵갉 좀 하자','1차 끝나고 그르륵갉 괜찮아?' 등으로 쓰면 . 간혹 '편맥'과 혼용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과는 결이 좀 다르다. 편하고 소탈한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그르륵갉은 편의점에서 먹고 마시는 행위 보다 대화와 소통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르륵갉은 이미 인터넷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밈으로 돌고 있었다. 편의점 의자에 앉으면-고문을 당하지 않았는데도-민감한 가정사부터 꾹꾹 참았던 고백, 감추고 싶은 비밀까지 자연스럽게 술술 털어놓게 된다고. 맞아~ 맞아~ 진짜 그래.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편의점 의자를 '진실의 의자'라고 불렸다.(경찰, 검찰 분들 참고하시길) 편의점 의자에 앉으면 유재석이나 오프라 윈프리 없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떤다고 해서 '지상 최대의 허름한 토크쇼', '코리안 카우치 테라피'라는 근사한 타이틀도 보유하고 있었다. 심약한 사람들에겐 '흑역사 제조기 경계 1호 대상'.


신조어들은 오저치고?(오늘 저녁 치킨 Go?)처럼 보통 줄임말이 대부분인데 그르륵갉은 청각적인 요소를 하나의 행위로 형상화 했다는 점에서 무척 참신하게 느껴졌다. 특히, 소리-상황-행동으로 몇 번의 치환을 거쳐 탄생한 함축어인지암호명 같은 비밀스런 뉘앙스까지 풍기 '속 깊은 대화'라는 측면에서 완전 찰떡이었다. 이렇게 뜻을 알고 나름의 해석을 해본 바, 그르륵갉은-국립국어원의 차용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엄청난 카피라이팅이었던 것이!! 

그르륵..갉.

다시 발음을 해보니 거짓말처럼 진짜 편의점 앞에 앉아 있는  의자를 끌때 느껴지는 그 미세한 진동이 두두두 손끝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맥주가 기고 다리를 꼬고 시답잖은 개똥 철학이라도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단 네 글자가 만들어내는 CVS 홀로그램! 이것이야말로 말로만 듣던 아날로그적인 디지털 감성인가 싶었다. 편의점 홍보맨으로서 이렇게 편의점 특유의 감성과 문화가 수면 위로 떠올라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인구에 회자가 될 때면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인기 많은 연예인의 매니저가 된 기분과 비슷하달까. 아무튼, 그르륵갉은 비록 생소하지만 생기는 발랄한 키워드로 우리의 편의점 생활을 더욱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물론, 모두가 알아 먹게 '편의점 가서 얘기 좀 하자'하면 되지만 시대적인 말맛이라는 게 또 있으니.. 하여간 요즘 것들의 언어란. 쯧. 내일 회사 가서 바로 써먹어야지. 후훗.


다음날

"팀장님, 그르륵갉이라고 아세요?"

"그게 뭐야? 외국어야?"

70년대생 팀장님은 역시 나와 같은 반응이었다.

"그르깡? 먹태깡 같은 거야?"

푸핫~ 먹태깡이라니. 뻘하게 터진 짭쪼롬한 오답이었다.

"에이~ 그것도 모르세요? 그르륵갉이 뭐냐면.."

나도 어제 처음 알았으면서 익히 그 용어를 쓰고 있던 잘파세대 전문가처럼 천연덕스럽게 브리핑을 해드렸다. 그럼에도 팀장님은 정확히 이해를 못하는 듯했고 20대인 후배 G가 그르륵갉이 자세히 나와 있는 온라인 게시글을 보여주고 나서야 '이거 재밌는데?'라며 트렌드 습득의 기쁨을 표출했다. 그리고는 회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상무님부터 그르륵갉을 모르고 있을 게 분명한 사람들만을 골라 혹시 그르륵갉을 아나며 질문을 던지고 (모른다고 하면)면박을 주고 또 친절히 답을 알려줬다. 그 모습이 엄청 즐거워 보였다. 그르륵갉이 X세대 아저씨를 이렇게 귀엽게 만들 줄이야.


마침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편의점 업계의 트렌드 안테나를 상시 곧추세우고 있는 마케팅팀에서 '그르륵갉' 앱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역시 그들은 모르는 것도 없고 빠르기까지 다.) 편의점 테이블의 단골 메뉴인 핫바를 구매하고 스탬프 응모를 하면 1등 경품으로 진짜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를 증정한다고. 같은 시기, 다른 이벤트들의 경품은 자동차, 항공권, 전자제품인데-아무리 그르륵갉이 모티브라 하지만-편의점 플라스틱 의자는 내가 봐도 정말 병맛이었다. 1등 당첨됐다고 편의점 의자를 집에 들고 들어가면 뭐 이딴 걸 가져 왔냐고 백퍼 엄마에게 등짝 스매시를 맞을 것이 분명한 하등 쓰잘데기 없는 물건 아닌가. 경품이 아니라 형벌에 더 가까운, 1등이라 기쁘지만 한편 달갑지 않은, 수령 후 1시간 이내 깨닫게 되는 애물단지. 이러니 나는 보도자료를 안 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재미난 걸. 예상대로 기사의 반응은 아주 쏠쏠했고 다수의 매체에서 영상 취재 요청이 들어왔다. <스0스뉴스>는 급기야 왜 의자 끄는 소리마저 유행이 되었는가, 사람들은 왜 편의점 의자에 앉기만 하면 진실을 말하게 되는가 등을 알아보기 위해 사회심리학 박사와 인간시스템디자인공학 박사 두 명을 직접 편의점 앞으로 불러모았다. 그들은 편의점 의자의 등판과 좌판의 각도가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돼 장시간 착석의 편안함을 주고 가볍고 말랑말랑한 플라스틱 소재라 체압을 분산해주는 기능까지 있다고 칭송했다. 또한, 다소 어둡고 허름한 분위기는 상대에게 더 집중하고 가식 없이 얘기할 수 있는 '심리적 마인드 셋이 점화된 상태'를 만든다며 아주 유식한 말들로 현상을 조목조목 풀이했다.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접근할 일인가 싶었지만 듣고 보니 알쓸'편'잡처럼 무척 재밌고 유익했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


나 역시 편의점 파라솔 의자에 앉아 숱한 밤을 지새우며 소중한 인연들을 많이 쌓았다. 그땐 뭐 그리 할 얘기가 많았던지.. 편의점을 냉장고 삼아, 가로등을 모닥불 삼아, 그르륵갉을 BGM 삼아 한참을 웃고 울고 또 웃으며 떠들었다. 소재는 무궁무진했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뒷담화는 기본, 연인과의 달콤한 로맨스부터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과 설계, 거기에 꼭 따라 나오는 신세 한탄, 100분 토론 버금가는 시대 비판와 일상 논평까지.. 간혹 술이 취한 아가리 파이터들이 맞붙을 때는 몸으로의 대화로 확장되며 편의점 의자가 눈앞에 난무하는 액션 활극을 찍기도 했다. 그래도 그때가 가장 풍요롭고 행복했다. 편의점 파라솔 아래 맥주캔과 과자 봉지가 수북히 쌓여 갈수로 플라스틱 의자 만큼이나 하찮은 우리들의 이야기는 멋진 아라비안 나이트로 완성됐다. 무슨 얘기를 그리 오래도 했는지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차를 기다리며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을 맞이할 때 느꼈던 그 묘한 뿌듯함 만은 진한 잔상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그럴 여유와 체력이 없지만 가끔 그때의 낭만이 그립다.


아, 그리고 그르르갉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또 하나의 킬링 포인트. 항상 그르르갉의 마무리는 "(다리를 긁으며) 어우~ 아직도 모기가 있냐? 춥다. 이제 들어가자."로 끝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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