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일상, 특별한 여행이라는 인식이 주는 우울함
6년 전, 처음 태국 치앙마이로 여행을 떠났다. 친구의 권유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세계 각국으로 여행을 많이 다니는 친구였는데, 치앙마이는 조용하고 차분한 도시이면서도 동남아답게 야시장이 활발해서 나와 무척 잘 맞을 것 같다며 적극 추천했다. 친구가 보여준 치앙마이 사진에 마음이 넘어가 치앙마이 10일, 방콕 3일로 여행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 가는 나라인데 맞을지 안 맞을지 걱정도 하지 않고 어떻게 2주나 갔지 싶지만, 그 당시 치앙마이 한 달 살기가 슬슬 떠오르고 있을 때여서 2주 여행도 짧게 느껴졌었다.
그렇게 무턱대고 떠난 치앙마이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시내로 가는 길엔 드넓은 하늘과 틈틈이 솟은 푸른 야자수가 가득했고, 나무보다 낮은 건물들이 굉장히 앙증맞게 느껴졌다. 숙소에 도착하니 모던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코끝에 닿는 이국적인 향 냄새가 나를 반겼고, 시장 좌판에 널린 망고, 용과 등 열대 과일들과 알 수 없는 태국어가 이곳이 낯선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낯선 나라에 뚝 하고 떨어진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신선했다. 심지어 골목만 걸어도 재미있었다. 낯선 골목을 걷다가 보이는 작은 소품샵을 구경하고, 색다른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을 먹는 건 어색한 만큼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귀국한 후에는 몇 개월간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매년 가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치앙마이 겨울 방문은 나의 연례행사가 될 참이었다.
행복한 두 번째 치앙마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2020년 1월, 코로나19가 세계적 대유행 조짐을 보이며 모든 하늘길이 막혔다. 이제 막 여행의 참맛을 알아가고 있던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일상의 모든 것에 제약이 생겼으니 여행 불가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집순이라 외출이 불가능한 것이 일상에 크게 방해가 되진 않았다. 친구들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연락은 잘 됐으니 오케이. 회사는 사무실 출근과 재택근무를 병행했고, 출퇴근길에는 바깥을 구경하고 집에선 모카커피를 시도하는 등 나름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납득된다면 시키는 대로 곧잘 하는 성격이라 일상 속 제약이 불편해도 화나진 않았다. 이런 일상에서 가장 불만은 당연히 여행을 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낯선 향 냄새가 그리워서 인센스 스틱을 사고, 레몬그라스와 고수의 맛이 그리워서 태국 음식을 자주 찾아 먹었다. 덕분에 비슷한 베트남 음식도 즐기게 됐다. 하지만 낮은 건물들 사이에 솟아오른 야자수와 좌판에 널리고 널린 열대 과일, 적은 1인분의 양만큼이나 훨씬 저렴한 밥값, 현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코코넛 크림 파이, 오후 일정을 적당히 끝내고 받는 1시간 30분짜리 마사지, 무턱대고 잡아탄 덜컹거리는 썽태우에서 구경하는, 영어 표기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이국적인 간판들은 내가 한국에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럴 때는 내 삶이 조금 불행한 듯 느껴졌다. 바쁘게 일하면서 친구들도 만나지 못하는 빡빡한 삶에서 1년에 한 번 보상받을 수 있는 유일한 휴식처가 사라진 기분. 그전까지는 분명 닿을 수 있는 천국이었는데 이젠 정말 천국이 되어버린 나의 파라다이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나니 영영 세상을 옭아맬 것 같던 코로나19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지체할 새도 없이 바로 치앙마이 겨울 여행을 계획했다. 약 2주 정도 머물면서 3년간 쌓여온 욕망(?)을 분출할 생각이었다. 3배나 훌쩍 뛰어오른 비행기 푯값은 충격이었지만, 곧바로 ‘3년간 비행기를 타지 않았으니 이 정도 비용은 괜찮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두 달간 치앙마이 여행만을 바라보며 업무를 쳐냈다. 아무리 힘들고 바빠도, ‘두 달만 있으면 난 치앙마이에 있을 거니까’, ‘한 달만 있으면 난 치앙마이에서 야시장 구경할 거니까’라는 생각으로 전부 버텨냈다. 그렇게 대망의 여행 날, 5시간의 저녁 비행 후 도착한 치앙마이는 정말 3년 전 그대로였다. 숨을 들이마시니 건기여서 약간 쌀쌀한, 그렇지만 한국보다는 훨씬 따뜻한, 아니 더운 치앙마이의 밤공기가 내 몸에 퍼졌다. 솔직히 약간 울 뻔했다. 시내까지 가는 익숙한 길을 바라보며 추억에 젖었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행복한 2주간의 여행을 기대하며 짐을 풀고 잠자리에 들었다.
여행 4일 차 아침, 이제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단적인 심경의 변화에 나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3년간 기대한 여행인데 4일 만에? 1일 차 밤에 도착했으니 실제 여행 기간은 단 2일이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질려도 되는 건가? 심지어 여행 7일 차 때는 이제 치앙마이에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달리는 오토바이 택시에서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치앙마이와 작별 인사를 했다 (쓰다 보니 제법 웃기다). 갈대도 울고 갈 나의 변덕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정말 혼자 여행 와서 다행일 정도였다.
귀국을 며칠 남기고 숙소 침대에 누워서 왜 갑자기 고대하던 여행에 흥미를 잃었을지, 이 변덕의 원인이 뭘지 고민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한국에서 보냈던 일상과 다를 바가 없다. 특별함을 기대했는데 한국에서의 일상과 똑같으니 흥미가 떨어졌다. 하지만 똑같이 밥을 먹고 길을 걸어도, 다른 맛과 다른 풍경 덕분에 행복한 것 아니었나? 그것이 여행 아니었나?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코로나 기간에 읽었던 책 속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극락은 어디이고 지옥은 어디인가?’
사실 정해진 극락과 지옥이 따로 없다. 누군가에겐 샐러드가 천상의 맛이겠지만, 누군가에겐 풀떼기일 뿐이다. 누군가에겐 디즈니랜드가 지상낙원이겠지만, 누군가에겐 유치하고 비싼 테마파크일 뿐이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물건도, 음식도, 장소도 가치가 달라진다. 온전히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무언가의 가치가 달라진다. 심지어 본인의 가치조차도. 절대적 가치가 변한다는 게 아니다. 절대적 가치라는 것은 사실 없다. 어떤 물건을 바라보는 사람이 백 명 있다면, 그 하나의 물건에는 백 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일상은 지루하고, 여행은 특별한 것이라는 인식은 그저 내가 매긴 가치일 뿐이다. 똑같이 밥을 먹고 길을 걸어도 다른 맛과 다른 풍경 덕에 행복한 거라면 그건 굳이 치앙마이가 아니어도 된다. 여행이 아니어도 된다. 그 행동이 행복한 거라면, 옆 동네에 가서 새로운 식당에 가고 낯선 골목길을 걷는 것 또한 행복 아닌가?
코로나19로 발이 묶였던 지난 3년간, 나는 일상에서 만족스러운 순간을 꽤나 많이 찾았다. 모카 포트를 알게 되어 에스프레소 머신과 캡슐 없이도 갓 내린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됐고, 제로웨이스트에 관심이 생겨 욕실용품을 샴푸바, 대나무 칫솔 등 친환경 제품으로 서서히 바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점과 도서관에 가기 어려워져 e-book 구독 서비스를 결제했는데, 생각보다 아주 편리해서 출퇴근길이든 언제든 책을 읽고 싶으면 10분이라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관심 없던 것들에 관심을 가지며 나의 시선도 변했고, 나의 일상도 변했다. 커피는 다 거기서 거기였는데, 어느 순간 집이 갓 내린 커피 향으로 가득해지고, 종이책이 진리라고 생각했지만 핸드폰으로 책을 읽게 됐다. 어느 것에도 우열이라는 것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내가 몰랐고, 경험해 보지 않아서 편협하게 대했던 거구나. 내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면 어떤 것이든 높은 가치가 생기는 건데. 이런 시선과 행동의 변화로 꽤나 즐겁게 일상을 다듬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 만족이 어느새 커져서 이젠 여행이 주는 만족만큼이나 거대해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일상에서 누리는 기쁨 이상을 여행에서 바라고 있었으니 여행이 무료하기만 했다. 여행이 무조건 일상보다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여행했다. 이것이 행복하다, 불행하다, 이름을 붙이며 가치를 매길 필요도 없었는데. 이미 일상에서 가치와 순위를 매기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지냈는데, 우열이란 것이 없단 걸 깨달았으면서도 여행을 와서는 굳이 일상과 여행을 무의식중에 비교했다. 이렇게 정리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치앙마이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구나. 내 마음이, 생각이 문제였구나. 치앙마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내가 그것이 좋으니, 별로니 하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있었다. 이 결론에 다다르자 남은 여행 동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왜 그때만큼 행복하지 않지? 라는 생각에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치앙마이의 골목이, 음식이 다시금 보였다. 오롯이 푸른 풍경을 즐기고, 오롯이 향긋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귀국하고, 몇 개월 후 퇴사 여행을 떠났다. 이번엔 유럽이었다.